"For all who are led by the Spirit of God are sons of God. For you did not receive the spirit of slavery to fall back into fear, but you have received the Spirit of adoption as sons, by whom we cry, “Abba! Father!” The Spirit himself bears witness with our spirit that we are children of God, and if children, then heirs—heirs of God and fellow heirs with Christ, provided we suffer with him in order that we may also be glorified with him." (Romans 8:12-17/ Joseph J.W. Shin/ mr.psalmist@gmail.com)
9.22.2010
한동대국제어문학부 K.자매님께.
샬롬!
비록 서로의 생각과 방법은 달라도, 단 하나의 목적(!), "하나님 나라"가 한반도 북쪽에서도 實現(실현)될 수 있도록 기도합니다. 그리고, 지금 이 시대에도 당신의 제자들에게 친히 말씀해 주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정의와 평화의 음성이 K.자매님의 삶과 사역을 언제나 이끌어 주시길 바랍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K.자매님이 스웨덴에 계실 때 미국 워싱턴주 몬로시에 위치한 에임(AIIM: Antioch Institute for International Ministries) 베이스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때 스웨덴에 갔었다면 K.자매님과 만날 수 있었을 텐데, 당시에는 제 아내가 첫째 아이를 막 출산했을 때이고 베이스 사정도 있고 그래서 가지 못했습니다.
지금 저는 개인적인 사정 때문에 공동체생활을 잠시 내려놓은 상태이며 모 회사에 취직을 해서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북한의 복음화를 위해 항상 기도하고 있으며 시애틀 지역 이민 1.5세들에게 북한에 대해 바른 문제의식을 갖도록 도전하는 일에 전념하고 있습니다.
우선 밝혀두고 싶은 것은, 저는 K.자매님의 북한에 대한 성경적인 관점에 반대할 의양이 전혀 없을 뿐더러, 그 수는 적지만 아직도 한국 젊은이들 중에 K.자매님과 같은 크리스천이 많이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고 용기를 얻고 있습니다.
다만 K.자매님의 편지 내용 중에 몇 가지 사실과 다른 부분이 있기에 그 부분에 대해서만 말씀 드리겠습니다. 본인의 허락 없이 제가 마치 목사님의 대변인이라도 된 것처럼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이 목사님께는 매우 송구스럽지만, 그래도 필요한 반론은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3개월이라는 비교적 짧은 기간 동안 강의내용 정도만으로 오 목사님의 선교관이나 한반도 역사관을 판단하기에는 다소 시간이 부족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K.자매님의 편지 내용이 오대원 목사님에 대하여 그 3개월 동안 경험하신 매우 단편적이며 주관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듯이, 저 역시 오 목사님에 대하여 제 주관적이며 단편적인 관점을 설명해 보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저는 오 목사님과 같은 동네에 살면서 지난 10여 년 이상 이 지역 한인교회에서 말씀을 전하실 때 설교를 통하여, 시애틀 화요모임을 섬기면서 비교적 가까이에서, 에임에서 훈련을 받은 후 베이스 간사로 섬기면서, 그리고 지금은 떠나 있지만 마음은 아직도 연결되어 있는 영적인 아버지와 같은 분으로써 제가 만난 오대원 목사님에 대하여 K.자매님의 편지내용 중에 서로 상반되거나 사실이 아닌 부분에 대해서만 (매우 한정적으로) 역시 제 주관적인 관점을 적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제 글 역시 틀릴 수 있음을 미리 양해해주십시오.
우선 "(편집자주)"라고 되어있는 부분에 오대원 목사님께서 마치 유신 반대 운동을 지지하시다가 추방된 것처럼 쓰여져 있습니다만, 이것은 사실과 다릅니다. 오대원 목사님의 부인이신 엘렌 사모님께서 대학생들이 데모하는 도중에 부상당하는 모습을 목격하시고는 미국 대사관에 가셔서 항의하셨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았습니다만, 오 목사님이 직접 데모에 참여하거나 공식적으로 유신체제 반대론을 가르치신 적은 없습니다. 물론 서울대학교 대학생들이 학교에 문을 걸어 잠그고 매우 맹렬하게 집단투쟁이나 단식투쟁을 할 때 학교 내부로 출입할 수 있었던 사람은 故 함석헌 선생님과 오대원 목사님 뿐이었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았습니다. 그러나 오 목사님 자신은 朴正熙정부나 유신체제에 대하여 공식적으로 반대하는 발언이나 행동을 하신 적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물론 유신체제를 반대한 것이 무슨 문제가 되지는 않겠지만 말입니다.)
그리고 오대원 목사님께서 추방당하신 때는 1970년대 유신체제 시절이 아니라 ('편집자주'에도 "1980년대"라고 적혀있듯이) 1986년이었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이때는 全斗煥정권 시절이죠. 유신체제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국민일보에 실린 오 목사님의 인터뷰 내용을 빌려오자면, 이때가 바로 88올림픽을 준비하던 때였다고 합니다.(참고: 국민일보 기사 "[역경의 열매] 오대원 (12) 88올림픽 앞두고 추방명령 '충격'")
또한 "(편집자주)"라고 되어 있는 부분에 보면 “NKSS에서… 훈련후 평양으로 아웃리치"(연구여행: Study Trip)를 계속 운영해온 것처럼 되어 있는데, 역시 사실이 아닙니다. 솔직히 제가 알고 있기로는 처음 2 회 정도 그런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곧 시행착오였음을 깨닫고 다시는 평양으로 연구여행(Study Trip)을 가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마 김성아님도 아웃리치가 아예 없는 훈련과정을 거치셨을 것입니다. 남북교류나 한반도 평화체제 유지가 우선이라고 주장하는 간사들과 북한 내 인권문제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간사들 사이에 의견 차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이러 저러한 이유로 지금은 더이상 평양에 가지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東北三省(동북삼성) 지역이나 중국 내 북한 근접지역에서 기도의 실제적인 능력을 직접 실습하고 체험하는 매우 독특한 '中保(중보)기도여행'을 구상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물론 기도만 하는 것은 사역이 아니라고 말씀하시는 분들도 많지만, 기도는 기독교 선교사역에 있어서 가장 실제적이며 중요한 행동이며 사역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만 하는 것 역시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편집자"님께서 직접 확인해보시고 만약에 NKSS가 아직도 평양으로 아웃리치를 가는 구상을 하고 있다면 저에게도 알려주십시오. 아니라면 정정해주시길 바라겠습니다. 언론의 사실 전달 정신에 남달리 투철하신 조갑제 대표님의 방향성과 어긋나는 한 개인과 특정 공동체의 역사에 대한 歪曲(왜곡)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K.자매님께서 쓰신 편지내용 중에 "NKSS에서 김일성 연구가 서대숙씨로부터 이승만 대통령과 대한민국에 대한 증오를, 그리고 북한과 김일성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을 배웠습니다."라고 말씀하셨는데, 옳은 말씀입니다. 그것은 徐大肅(서대숙) 박사님 개인의 관점이지요. 저는 徐大肅 박사님의 관점에 대해 반대하며 비판적입니다. 이분은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런 관점은 徐 박사님 개인의 관점이라는 점과 이분은 기독교인이 아니라는 점을 미리 염두에 두시고 들으셨으리라 여겨집니다. 그 자리에서 충분히 반론하시고 논쟁을 하실 수 있었다면 좋았으련만, 그럴만한 분위기가 조성되지 못한 것은 정말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제 徐大肅 박사님은 NKSS 강사로 오실 수 없게 되었습니다. 내부 사정은 저 역시 알 수 없지만, 더 이상 徐 박사님을 NKSS 강사로 초청하지 않기로 결정했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북한 정권을 상대할 때에는 그들을 자극할 수 있는 북한주민들의 인권문제는 언급하지 말아야 한다”라고 목사님(오대원 목사)이 말씀하셨다는 부분, 이것은 선교사가 직접 북한 정권(북한 정부 관계자)을 상대할 때인 것 같습니다. 정확하게 어떤 상황에 대해서 이런 발언이 나왔는지는 앞뒤 문맥을 알 수 없어서 뭐라 변론을 해야 할지 조금 모호하지만, 아마도 피터 양 목사님과 같이 人道主義的(인도주의적) 사역을 하시는 분에 한해서 적용되는 말인 것 같습니다. 안 그래도 바로 다음 문장에 피터 양 목사님 이야기가 나오는군요. 아시다시피 피터 양 목사님은 이민 1.5세 캐나다인으로 북한의 고위 관리들과 직접 교류하며 나름대로 진실하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시도하고 계십니다. 피터 양 목사님의 친북 성향의 사역 방식(북한 고위 관리들과 직접 교류하며, 평양에 방문하는 사역)에 대해서는 예수전도단(오대원 목사 창립) 내에서도 이미 충분히 비판을 받고 계십니다. 하지만, 양 목사님과 같은 사역도 필요하다는 것 역시 사실인 것 같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더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단, 피터 양 목사님은 현재 오대원 목사님께서 직접 지도하시는 안디옥선교훈련원 소속이 아니십니다.
그런데 피터 양 목사님이 “탈북자 말을 믿지 말라”고 하셨다는데, 저는 무엇인가 심각하게 왜곡(歪曲)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아마도 “탈북자의 말이라고 무조건 믿지는 말라”는 뜻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지만, 분명히 무엇인가 심각하게 곡해(曲解)하고 있거나 왜곡된 부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오대원 목사님과 관련된 모든 공식사역은 이중언어(영어와 한국어)로 진행됩니다. 동시통역이 제공되었을 텐데, 조금 더 정확하게 당시 상황을 설명해주시면 어떨까요? 왜냐하면 오대원 목사님 주변에는 탈북자 출신으로 친딸처럼 여기시는 분도 있고 그러거든요. 그런 분들이 들으시면 오해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시애틀 지역에서는 한 달에 한두 번씩 오대원 목사님이 인도하시는 북한을 위한 중보기도 모임이 있습니다. 저도 예전에는 매번 참석했었는데,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모입니다. 한동안 민감한 분위기도 있었는데, ‘인권이 먼저냐? 예배의 회복이 먼저냐?’ 뭐 이런 식의 논쟁이었습니다. 정말 쓸데없는 논쟁이지요. 인권을 보장하는 것이 예배의 회복을 위한 길이요, 예배를 회복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인권을 보장하는 길이지요. 그런 논쟁이 있고 바로 다음 모임에서 오대원 목사님은 자료를 직접 프린트해오셔서 스무 명 가까이 되는 참석자들에게 나눠주시며 한국과 일본 등에서 북한으로 납치된 납북자들에 대한 문제의 심각성을 설명하시고, 매 모임마다 납북자들을 위한 중보기도를 직접 인도하셨습니다. 동시에 북한 내 인권상황에 대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기도 역시 잊지 않으셨습니다. 참고로 말씀 드리자면, 에임에서 말씀묵상과 중보기도 사역은 가장 중요한 중심사역입니다.
분명히 무엇인가 오해가 있으신 것 같습니다.
그리고 홍정자 사모는 故 홍동근 목사의 부인이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갑자기 헷갈리는군요. 홍동근 목사님은 작고하신 한경직 목사님이 목회하시던 때에 영락교회 부목사로 계시다가 미국 LA지역에서 목회를 하시던 한국의 대표적인 기독교-사회주의자입니다. 나중에 ‘김일성종합대학’에서 기독교(아마도 기독교-사회주의)를 강의하시다가 평양에서 돌아가신 분이지요. (예전에 김동길 교수님께 “적화통일이면 어떻소”라고 말씀하셨다가, 김동길 교수님이 그분께 “그러면 북진통일이면 또 어떻소”라고 엄포를 놓으셨다는 바로 그 홍동근 목사님입니다.) 명백한 기독교계의 친북파이십니다. 평양에 무슨 열사릉인가 하는 곳에 묻히셨다고 들었습니다.
저 역시 오 목사님이 홍동근 목사님의 기독교-사회주의나 홍정자 사모님의 친북-활동에 대해서 비판하시는 것을 들어보진 못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오 목사님께 직접 홍동근 목사님의 기독교-사회주의에 대하여, 또는 홍정자 사모님의 친북-활동에 대하여, 복음주의 기독교 선교사의 관점에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물어본 적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안디옥선교훈련원 내외의 관련자들 중에는 홍정자 사모님과 같은 친북파를 통한 북한선교 사역에 대해 비판적이거나 반대하는 분들도 많이 있다는 점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그런데 故홍동근 목사님과 친분이 있고 부인이신 홍정자 사모님을 강사로 초청하신 오대원 목사님이 문제라면, 주체사상 이론가이신 黃長燁(황장엽) 선생님의 '인간중심의 철학'의 독창성을 높게 평가하고 저서를 추천하신 대한민국 애국세력의 대표 趙甲濟 대표님은 주사파이거나 人本主義者(인본주의자)라고 해야 하며, 李御寧(이어령) 박사님이 명예원장으로 계신 '양화진 문화원'에서 다음 주 목요일 저녁에 참여연대 출신 朴元淳(박원순) 변호사를 강사로 초청했으니 '알고보니 한통속'이라고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말씀드릴 것은, NKSS는 현재 진행중인 다양한 북한사역의 형태를 짧은 기간 동안 접해보고 기도와 예배를 통해 각자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라 특정한 사역을 프로젝트 형식으로 구상해보는 시간을 제공해주는 특별한 프로그램입니다. 그 핵심에는 나와 하나님, 우리와 하나님, 그리고 우리와 세상(NKSS의 경우 북한)이라는 삼중적 공동체관(觀)이 있습니다. 그런데 K.자매님께서 이 “3개월 간의 강의를 들으며, 저는 ‘이것은 옳지 않다’고 외치는 제 양심의 소리와 목사님의 가르침 사이에서 극심한 혼란을 느꼈지만 결국 목사님의 생각을 따르기로 결정했습니다. 그 당시 제게는 수많은 한국교회 목사님들의 인정을 받고 있는, 고명하신 목사님의 가르침을 무시할 만한 용기가 없었기 때문입니다.”라고 말씀하신 부분이 마음에 많이 걸립니다. 왜냐하면 저는 지금까지 안디옥선교훈련원과 관련이 있는 친북적 선교사역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반대하면서도, 오대원 목사님의 본심이나 본지(本旨)에 대해서는 전혀 의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친북적인 인사로 분류되는 당사자들에게 물어보시면 더욱 확실하게 이해하실 수 있으리라 여겨집니다.
물론 오대원 목사님의 카리스마(?)에 눌리는 기분이 들 때가 많이 있다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진지하게 때로는 마음속의 깊은 회의까지도 오 목사님께 직접 상의하셨더라면 아마도 목사님 역시 마음을 열고 당신의 생각을 나눠주시지 않으셨을까 생각해보게 됩니다. 정말 아쉬운 마음이 듭니다. 그런데 그 전에, 오 목사님 자신은 그렇지 않은데 마치 그런 것처럼 미리 예단하고 물어본다면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기분이 썩 좋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결론입니다. 저는 오대원 목사님에 대하여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만을 따르고자 평생을 헌신하신 예수의 弟子(제자)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동시에 오 목사님은 자신에게 주어진 지상명령의 사명을 망각하지 않고 전도의 대상에 한계를 정하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오대원 목사님은 그 대상이 친북파이든 김정일이든 구분하지 않고 그 앞에서 자신이 해야 할 말과 행동을 명확하게 알고 계시는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일 뿐입니다.
북한의 복음화를 막고 있는 가장 큰 장애물은 무엇일까? 우선 북한 밖에 있는 그리스도의 교회가 하나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것이 아마도 오대원 목사님에 대해 조갑제닷컴에까지 비판하는 글이 올라오는 이유가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참되고 영원한 평화와 공의 그리고 은혜가 K.자매님의 삶과 사역에 항상 함께 하시길 기도하겠습니다. 샬롬!
---> K.자매님의 답글(조갑제닷컴): (1) 신정우님 안녕하세요. 이제까지 올려주신 댓글, 모두 신중히 읽어보았습니다. 신정우님께서는 '아무래도 제가 3개월이라는 비교적 짧은 시간을 목사님과 함께 보냈기 때문에 그 분의 방향성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할 것'이라는 선입견을 갖고 계신 것 같습니다. (2) 하지만 그 생각은 옳지 않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 설명드리겠습니다. 이유를 설명 드리기에 앞서 제가 참석했던 NKSS는, 오대원 목사님께서 기획하신 훈련과정이었다는 것에 대해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3개월이라는 훈련기간과 강의의 방향성은 목사님께서 결정하신 사안이었고, 그에 대한 영적 책임은 오대원 목사님께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에 대해서는 신정우님께서도 이견이 없을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보낸 2007년 가을의 3개월은, 제가 수료한 NKSS의 방향성 조차 파악하지 못할 정도의 짧은 기간이 아니었습니다. (3) 스쿨의 방향성을 이해하는데에는 3개월이라는 '시간의 길이'보다 당시 훈련과정 중에 '얼마나 성실하게 참여하였는가'의 여부가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훈련의 전체 기간이 1년인 프로그램에 3개월 만을 참여한 경우와 훈련의 전체 기간이 3개월인 프로그램에 3개월을 모두 참여한 경우, 이 둘 사이에는 훈련을 이해하는 정도에 있어서 분명히 큰 차이가 있습니다. 두 경우 모두 '3개월'이라는 같은 시간을 훈련에 참여했지만 전자의 경우에는 훈련과정의 25%만을 참여하였기 때문에, 전체 훈련과정에 모두 참여한 후자에 비해서 훈련에 대한 이해가 부족할 것입니다. (4) 저는, 혼란이 극에 달해서 수업에 참석하지 못했던 하루 (제가 기억하기로 그 날은 수업이 없었습니다.)를 제외하고는 NKSS의 시작일부터 졸업식까지, 모든 수업에 참석했습니다. 즉 목사님께서 기획하신 전체 강의와 연구활동에 참석하였고, 그에 대한 증명으로 훈련에 대한 수료증을 받아왔습니다. 그렇기때문에 저는 훈련의 방향성을 파악하기에 충분한 시간을 가졌고, 앞서 글에서도 말씀드린 것 처럼 훈련이 끝날무렵에는 목사님의 생각을 따르기로 결정을 내리기도 했습니다. (5) 따라서 '제가 훈련의 방향성을 이해하기에 다소 짧은 시간을 가진것 아니냐'는 신정우님의 생각은, 제게는 해당되지 않는 말이라고 생각됩니다. 마지막으로 신정우님, 신정우님께서 제기하신 문제는 제 글의 논지와 결론에 영향을 줄 수 없는 내용들입니다.
---> 신정우 답글(조갑제닷컴): (1) K.자매님, 정말 감사합니다. 이제야 비로소 K.자매님과 직접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되었네요. 반갑습니다. 우선, 안디옥선교훈련원은 저에게는 영적인 고향과도 같은 곳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 개인의 주관적이고 단편적인(일반 관객의 입장에서 직접 참여하는 간사생활까지 모두 대략 12~3년 정도의 관계) 관점을 말씀 드리는 것이라고 미리 밝혔던 것입니다. K.자매님께서 훈련과정 자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 과정 자체만으로 오 목사님에 대해 판단하는 것이 주관적이고 단편적으로 보인다는 의미였습니다. 시애틀에서 함께 말씀공부를 하던 청년들 중에 한동대 출신이 서너명 있었습니다. 모두 출중한 지성과 영성을 겸비한 젊은 인재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K.자매님이 훈련에 임했던 태도 자체를 의심하거나 비하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은 이해해주셨으면 합니다. (2) 그리고 모든 YWAM 사역이 그렇듯이, NKSS 역시 사역을 준비할 때에는 참여하는 모든 간사들이 1년 이상 매주 2~3회 정도 모여서 기도하고 조사하고 함께 나누면서 그 방향성과 일정을 계획합니다. 당시에 저는 NKSS 간사도 아니었지만, 매주 기도모임과 연구모임에 참석했습니다. 사실 스웨덴에서 있었던 NKSS 준비과정 중에는 다른 간사님이 실무 책임자이셨습니다. 하지만 말씀하신대로 "그에 대한 영적 책임은 목사님께 있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사실이지요. (3) 그런데 혹시 K.자매님은 오대원 목사님께서 북한주민들의 인권문제를 완전히 무시하시는 분이라고 여기시는 것인지요? 저는 그렇지 않다고 반박하고 있는 것입니다. K.자매님의 글에서도 나타나듯이 목사님 자신이 "북한 정권"과 "북한주민들"을 확실하게 구분하시지 않습니까. 전체주의, 주체사상에 물들어 있는 反인권론자들은 기본적으로 이런 말을 하지 않지요. 개인적으로 제 외가 친척들 중에 김일성주체사상에 빠져서 명절 때만 되면 "우리 위대한 아바이 수령님" 어쩌구 하며 술잔을 돌리는 소위 주사파, 골수 친북파들이 여럿 있어서 잘 압니다. 사실 오대원 목사님은 북한 주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인권을 소중하게 여기십니다. 오대원 목사님의 "북한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기도책자 스무 번째 날 기도문을 다시 한번 확인해보십시오. "한 어린이 한 어린이"의 이름까지 부르며 기도하라고 강조하십니다. 아시다시피 이 기도 안내 책자는 1998년에 있었던 제1회 NKSS를 위해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4) 그리고 한 가지 여쭤볼 것이 있습니다. K.자매님은 그때 수료하신 NKSS 훈련과정의 방향성 자체에 문제가 있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K.자매님의 편지를 처음 읽었을 때에는 오 목사님이나 피터양 목사님, 서대숙 박사님, 홍정자 사모님 등에 대해서만 문제를 제기하시는 줄 알고 있었는데, 그렇지 않은가 봅니다. 스웨덴에서 진행된 NKSS에는 K.자매님의 편지내용에 포함되어 있지 않은 다른 강사님들도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분명히 북한 내 인권상황과 관련된 사역을 하시는 분도 있었지 않습니까?(북한말 성경제작에 동참하시는 탈북자 출신 여성분? 북한 내 인권 관련 사역을 하시는 S.선생님?) 간사님들 중에도 북한 내 인권문제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평양 방문을 반대하시는 리더들도 서너명 있었고요. 그런 이야기를 빼고 나머지만 기억하시는 것이 조금 아쉽고 그렇습니다. 오해하지 말아 주십시오. 이것은 제 개인적인 경험입니다. 저는 AIIM에서 강의를 듣고 훈련을 받고 그럴 때 처음에는 제 생각과 반대되는 강의에 대해서만 강하게(부정적으로) 기억하고,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강의에 대해서는 그냥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물론 다혈질적인 제 성격 때문에 그런 경향이 있지만 말입니다. (5) 본의 아니게 K.자매님을 비판하는듯한 느낌을 드렸다면 정말 죄송합니다. 오대원 목사님에 대하여 사실과 다른 내용이 한국 보수주의 운동의 대표적 웹싸이트인 조갑제닷컴에 올라온 것에 제가 너무 흥분을 했던 것 같습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자면, K.자매님의 편지내용 밑에 부분에 적힌 성경적인 생각에 대해서는 반대할 의양이 전혀 없을 뿐더러, 오히려 용기를 얻고 있습니다. 다만, 오해하신 부분에 대해서만은 꼭 말씀을 드려야겠다 싶었습니다. (6) 어쨌든 K.자매님처럼 열정적이고 비판할 때 비판할 줄 아는 젊은 인재를 놓친 것은 에임 입장에서도 그다지 긍정적인 일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K.자매님이 그때 하루 강의를 빠지실 정도로 내적인 회의와 갈등이 있었다고 하셨는데(어차피 그날은 수업이 없었다고 하셨지만), 그 갈등과 회의는 아마도 통일이 되는 그날까지 어쩌면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모든 크리스천들이 끝없이 혁신(革新)해야 할 영적인 "식역(識閾: Limen)"이라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Samuel Rutherford나 Edmund Burke 등의 사상가들이 성서적 진리 위에 그 기반을 닦은 정통 기독교-보수주의를 지지하고, 한반도 상황에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 정책"을 선호하지만, 그래도 이 모든 것이 완벽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매사에 오직 성경말씀을 영원불변(永遠不變)의 절대적 진리로 여기면서(보수) 유한한 세상의 상대적인 현실에 대해서는 끝없이 개혁해 나가야 할 부분(진보)도 있다는 사실을 잊지는 말아주십시오. K.자매님은 이미 그러고 계시겠지만 말입니다.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빌1:12-29)
8.22.2010
라마단 특집: 이슬람의 도전 그리고 기독교적 숙고 4
한 점의 흠이나 티끌만큼의 죄도 없으신 거룩하신 하나님의 어린양, 오직 그분이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보배로운 피를 흘려주셨기에 인간은 구원을 얻게 되었다고 가르치는 것이 바로 복음(福音)의 핵심적인 메세지입니다.
그리고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이 보배로운 피로써 이루신 구원의 역사(役事)에 대하여 단순히 인간의 죄를 면해주신 "속죄제물(贖罪: Expiation)"로써의 수준을 넘어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전혀 새로운 관계로 재정립되는 "화목제물(和解: Propitiation)"로써의 수준이라는 것을 매우 실제적으로 설파(說破)하고 있습니다.(롬 3:25, 5:11)
주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이 보배로운 피로써 재정립된 하나님과 인간의 전혀 새로운 관계란, 죄의 노예였으며 악의 종노릇하던 인간이 천지만물을 창조하셨으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아빠"(롬 8:15,23)라고 부를 수 있는 "자녀의 권세"를 얻게 된 것을 말합니다. 즉 '하나님의 가족'으로 입양된 것입니다.
이와 같이 기독교 신앙의 가장 핵심적인 위치에 있는 거룩한 입양의 교리는 인류의 역사에 있어서 복음이 들어가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나 큰 변화의 바람을 불러 일으키는 복음주의 정신의 바탕이 되었습니다. 예전에는 그저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가문의 대(代)를 이어받을 아들이 없을 경우 가문의 명예와 재산을 대물림하기 위해 이루어졌던 양자제도가,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써 거룩하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그 은혜에 대한 깊은 감동과 신앙을 실제적으로 실천하고자 부모를 잃고 세상에 버려진 어린 고아들을 직접 자녀로 삼는 입양운동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특별히, 6.25-한국-남침전쟁 이후 급증한 전쟁고아들을 머리색이나 피부색이 완전히 다른 양부모들이 해외에서 스스로 찾아와 이 아이들을 자식으로 삼겠다며 시작된 입양운동(예를 들면: 해리 홀트와 버다 홀트 부부 )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에 대한 깊은 이해와 감동 없이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Korea continues to send children out of the country for adoption; in recent years, roughly 1 of 250 Korean births are adopted by American families alone. There has been a declining trend in adoptions in recent years, but this is only due to a drop in the Korean birth rate, which is now the lowest of any developed country.(Korean Ministry of Health and Welfare, 2002)
한편, 이미 전글에서 확인했다시피, 이슬람교에서는 코란의 가르침에 따라 입양제도 자체를 법적으로 금지하고 있습니다.(참고: Adoption Dashboard - Intercountry Adoption Restrictions) 그렇다면 왜 코란의 이런 가르침이 가능할 수 있었느냐? 그 본질적인 이유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보겠습니다.
애시당초, 이슬람교에서는 '삼위일체'라는 개념을 "쉬르크(아랍어: شرك)"에 해당되는 유일신 알라에 대한 가장 가증하며, 용서받을 수 없는 죄로 취급합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물론 예수님을 하나님의 선지자로써 높이 인정은 하지만, 동일한 인간인 예수가 어떻게 각 개인의 윤리적이며 도덕적인 행위의 죄에 대하여 대속(代贖)해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전에, 이슬람교에서는 원죄(源罪) 개념을 아예 부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 피를 통한 대속(代贖)적 구원의 역사(役事)가 없어도 인간 스스로의 행위만으로 죄 사함을 얻을 수 있다고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들의 경전인 코란의 가르침에 의하면, 아담의 죄는 아담 자신의 즉각적인 회개로 인해 그 자리에서 자비로우신 알라에 의하여 죄 사함을 이미 받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슬람교의 교리에서는 죄의 세대에 걸친 전가(轉嫁)라는 것은 아예 없다고 가르칩니다.
중요한 것은, 이 것은 논리적인 문제가 아니라 역사적인 문제라는 것입니다. 신구약 성경을 믿는 기독교인의 입장에서는 창세기에 엄연히 기록되어 있는 역사적 사건에 대하여 완전히 왜곡하여 변질시킨 코란의 내용을 인정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이와 같은 터무니없는 조작에 대해 차마 조소(嘲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물론, 무슬림들의 종교심에 대해서는 깊은 경의(敬意)를 표하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터무니 없는 역사 왜곡을 담고 있는 코란을 경전으로 믿는 이슬람교가 아니라 우리와 똑같은 신구약 성경을 읽고도 인간의 원죄에 대한 가르침을 흐지부지 무시하거나, 또는, 복음의 핵심적인 교리를 교묘하게 오염시키는 기독교 내부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자비를 강조하며 정의로우신 하나님의 거룩한 분노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는 기독교-평화주의가 그래서 문제인 것입니다. 거룩하시기 때문에 분노하실 수 있는 하나님의 정의(正義)에 대해서 무지하거나 무시한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은 일개 휴머니스트의 영웅적 희생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인류의 원죄와 그로부터 파생되는 세상의 모든 죄문제에 대하여 인간(나)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거룩한 분노의 대상인 "화목제물(Propitiation)"로써의 죽음이었습니다.
"8그러나 우리가 아직 죄인으로 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써,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9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로 의롭게 되었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에서 구원을 받으리라는 것은 더욱 확실합니다. 10우리가 하나님의 원수로 있을 때에도 그분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화해하게 되었다면, 하나님과 화해가 이루어진 지금에 와서 하나님의 생명으로 구원을 받으리라는 것은 더욱 확실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11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또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자랑합니다. 지금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화해가 이루어졌습니다." (로마서 5:8-11, 표준새번역)
그리스도인 한명 한명이 나의 죄를 대신하는 "화목제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얼마나 깊고 실제적으로 깨달을 수 있느냐, 이것이 바로 우리가 얼마나 우리의 가정과 교회를 복음적으로 세울 수 있는지, 그리고 더 나아가, 세상의 고아와 길 잃고 방황하는 이 시대의 이방인들을 우리의 공동체로 입양할 수 있느냐를 결정하는 가장 핵심적인 복음의 정신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다음편에서 계속.....
샬롬!
j.w.s.
도표출처: http://en.wikipedia.org/wiki/International_adoption_of_South_Korean_children
사진출처: http://icarecampaign.springnote.com/pages/5622089
[Why]
"내 아버지는 聖者의 두 아들을 죽였습니다"8.20.2010
라마단 특집: 이슬람의 도전 그리고 기독교적 숙고 3
그런데 '죄사함'의 교리는 기독교에만 있는 가르침이 아닙니다. 이슬람교에도 죄사함의 교리가 있습니다.
이슬람교와 기독교 사이에는 죄에 대한 개념 자체가 다릅니다. 이슬람교는 원죄(原罪) 개념 자체를 부인하고,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누구나 죄 없는 선한 상태로 태어난다고"(출처: 중동선교회,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구원관 비교연구3-죄") 가르칩니다. 아담의 행위로부터 시작된 인류의 타락을 아예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슬람교에서의 '죄 사함'이란 무엇인가? 각자가 살아가면서 짓게되는 개인의 윤리적, 도덕적 행위의 죄에 대한 용서를 받는 것을 말합니다.
아래 비교표는 한국인을 상대로 이슬람의 교리를 가르치기 위하여 이슬람교측 한국선교부 웹싸이트에 기독교의 교리(左)와 이슬람교의 교리(右)를 비교해놓은 것의 일부분입니다. 특별히 '죄 사함'에 관련된 내용만 따로 떼서 모아보았습니다. (참고로, 이 비교표 원본에는 띄어쓰기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라마단 특선...." 첫 글을 보낼 때 이미 확인했듯이, 저는 이슬람교의 교리를 비판하거나 폄론(貶論)하고자 제 소중한 밤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위 비교표를 읽어보시면 도저히 그냥 묵고할 수 없는 이단적인 내용이라는 것을 쉽게 아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이 글을 쓰고 있는 이유는 이슬람의 도전에 비추어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기독교의 기본진리를 다시금 새롭게 그리고 더욱 깊게 성찰해보자는 뜻에서 입니다. 그러므로, 위 비교표 내용 중에 터무니없이 이단사설(異端邪說)적인 부분에 대한 기독교적 변증은 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면 이제 기독교에서 말하는 '죄사함으로 얻는 구원의 은혜는 과연 무엇인가?'에 대해서 생각해보겠습니다.
어제 보내드린 글에서 제가 신학적 용어 선택을 잘못한 부분이 있었습니다. 글 말미에서 한자어로 된 한글 "속죄(贖罪)"에 대하여 영어 단어 "Propitiation"을 사용한 것입니다. 이 단어 선택이 전혀 틀렸다고 할 수는 없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정확한 것은 아닙니다. 한자어 "속죄"에 대한 정확한 영어 단어는 "Expiation"이 정확합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전하신 구원의 복음은 "속죄(贖罪)" 그 이상을 의미합니다. 속죄는 그 행위의 대상이 죄를 속량하는 것 자체에 국한되어 있지만, 복음이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로써 얻는 구원의 역사(役事)는 죄를 사함받는 것 그 너머의 과정에 대해서까지 매우 상세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 3장 25절에서 "Propitiation(ἱλαστήριον)" 즉 "화목제물"이라는 구약적 단어를 매우 명확한 의도를 갖고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26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로마서 3장 23-26절)
기독교는 단순히 죄를 사함받는 수준에서 끝나는 종교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인간의 죄에 대한 속죄의 수준을 넘어서, 하나님의 "분노"를 달래어 다시 인간을 사랑하시는 분으로 돌리는 "화목제물"로써의 의미를 다루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속죄제물"이 되시어 죄를 속량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화목제물"이 되시어 인간을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하기 위한 모든 법적 절차 및 검증을 완료해 놓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일부 기독교 종파 내에서조차 이 "화목제물"의 교리를 무시하고, 하나님께는 분노와 같은 감정이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슬람의 저 위 비교표에 나열되어 있는 이단사설적인 주장은 기독교 내부에서도 종파(예를 들면: Unitarian Universalist)에 따라 많이 혼란스러워 하는 내용이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요즘 특히 한국 기독교계 젊은층에서 유행하고 있는 기독교-평화주의가 그 한 예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소위 평화지상주의적 기독교인들은 "용서"만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용서 그 이후의 단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는 거룩한 입양의 수준에 대해서는 그다지 깊게 생각하려 하지 않는 경향이 있어보입니다.
한국 개신교 역사에는, 손양원 목사님 같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전하신 거룩한 입양으로 이어지는 하나님의 구원의 복음을 직접 삶으로 실천하며 분투하신 신앙의 선배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어떤 축복보다 한국교회의 이 흐름을 이어 받은 우리 한국인 크리스천은 미국에 살면서 한국 개신교 역사에서 복음의 진수를 제대로 따르고자 희생하시고 순교하신 믿음의 선조들의 정신을 우리 후세들에게 전수해줄 의무가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우리(나) 자신이 그 정신을 실제적으로(행동으로 옮길 수 있을 만큼) 깨닫고, 나 자신의 삶으로 받아드리는 것이 먼저라는 생각이 듭니다.
다음편에서 계속....
샬롬!
j.w.s.
책 "나의 아버지 손양원 목사" 중에서
1948년 10월에 일어난 여수, 순천 반란 사건에서, 손양원 목사님은 자신의 두 아들을 모두 잃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단지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자신의 두 아들을 무참하게 살해한 좌익 바란군 청년이 잡히게 되자, 두 아들들을 대신해 자신의 양자로 삼으셨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의 이야기를 이렇게 함부로 인용해도 되나 싶어서 두려운 마음이 앞섭니다. 하지만, 제가 이 라마단 기간동안 매달리고자 하는 복음의 진수에 대해 이보다 더 적합한 예는 없다고 사려되기에, 순교한 두 아들의 영결식에서 손양원 목사님께서 직접 읽으신 감사문을 이자리에 옮기겠습니다. (저는 이 부분을 옮기기 위해서 조금전까지 손양원 목사님의 맏딸이신 손동희 권사님께서 쓰신 "나의 아버지 손양원 목사"라는 책을 다시 정독했습니다.)
"여러분, 내 어찌 긴 말의 답사를 드리리요. 내가 아들들의 순교를 접하고 느낀 몇 가지 은혜로운 감사의 조건을 이야기함으로써 답사를 대신할까 합니다.
첫째, 나 같은 죄인의 혈통에서 순교의 자식들이 나오게 했으니 감사.
둘째, 허다한 많은 성도들 중에 어찌 이런 보배들을 주께서 하필 내게 맡겨 주셨으니 감사.
셋째, 3남3녀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두 아들 장자와 차자를 바치게 된 나의 축복을 감사.
넷째, 한 아들의 순교도 귀하다 하거늘 하물며 두 아들의 순교이리요. 감사.
다섯째, 예수 믿다가 누워 죽는 것도 큰 복이라 하거늘 하물며 전도하다 총살 순교 당함이리요. 감사.
여섯째, 미국 유학 가려고 준비하던 내 아들, 미국보다 더 좋은 천국에 갔으니 내 마음 안심되어 감사.
일곱째, 나의 사랑하는 두 아들을 총살한 원수를 회개시켜 내 아들 삼고자 하는 사랑의 마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
여덟째, 내 두 아들의 순교로 말미암아 무수한 천국의 아들들이 생길 것이 믿어지니 감사.
아홉째, 이 같은 역경 중에서 이상 여덟 가지 진리와 하나님의 사랑을 기쁜 마음, 여유 있는 믿음 주신 우리 주께 감사.
끝으로 나에게 분수에 넘치는 과분한 큰 복을 내려 주신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립니다. 이 일들이 옛날 내 부모님이 새벽마다 부르짖던 수십 년 간의 눈물로 된 기도의 결실이요,나의 사랑하는 나환자 형제 자매들이 23년 간 나와 내 가족을 위해 기도해 준 그 성의의 열매로 믿어 의심치 않으며 여러분들께도 감사드립니다."
("나의 아버지 손양원 목사" 손동희 지음, 아가페, 225-226쪽)
라마단 특집: 이슬람의 도전 그리고 기독교적 숙고 2
"만일 너희가 고아들을 공정하게 대처하여 줄 수 없을 것 같은 두려움이 있다면, 좋은 여성과 결혼하라 두 번 또는 세 번 또는 네 번도 좋으니라 그러나 그녀들에게 공평을 베풀어 줄 수 없다는 두려움이 있다면 한 여성이거나 너희 오른손이 소유할 것이거늘; 그것이 너희를 부정으로부터 보호하여 주는 보다 적합한 것이라." (코란 4:3)
위에 있는 코란 구절 중에 "좋은 여성과 결혼하라"라고 쓰여져 있는 부분을 영문으로 된 의역본에서는 "그들(고아들)의 어머니들과 결혼하라(you may marry their mothers)"라고 번역해놓았습니다. 즉, 이슬람의 경전인 코란에서는 고아문제를 해결 하기 위한 방법으로 고아들의 어머니들(총 4명까지)과 결혼하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부다처제는 타당할 뿐 아니라, 사회정의 면에서도 반드시 필요한 제도라는 논리입니다.
언뜻 듣기에 코란의 이 가르침은 고아문제에 대한 매우 획기적인 해결방법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고아에게 어머니가 있다면 사실상 그 아이는 고아가 아니지요. 이 영역본이 잘못되었는지, 아니면 쿠란을 쓴 저자의 생각 자체에 문제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전체적인 문맥상 이 영역본의 번역 자체에는 그다지 큰 문제가 있어 보이지는 않습니다. 한마디로, 진짜 고아들에 대한 해결방법은 아닙니다.
흥미로운 것은, 코란 제33장에는 이슬람의 창시자 무함마드가 자이드라는 자신의 노예 출신 양자의 아내인 자이나브를 취하기 위하여 알라의 계시를 이용하는 불미스러운 이야기가 나오는데, 바로 이 구절에 나오는 계시 내용 때문에 이슬람 세계에서는 아직까지도 입양제도를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아래 첨부해놓은 중동선교회(MET, Middle East Team) 이만석 목사의 글을 읽어보시면 이슬람 사회가 왜 입양제도를 인정하지 않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 [이만석 부회장 칼럼] 이슬람에서는 왜 양자를 금할까?)
그래서인지, 이슬람 세계는 해외입양을 보내지도 않지만 받지도 않습니다. 근본적으로 입양이 고아문제 해결을 위한 실용적인 방법이 아닐 뿐 아니라, 알라의 계시를 모독하는 제도라는 것이지요. 아래 도표를 보시면, 이슬람 국가들은 자국의 어린아이들을 해외로 입양을 보내지 않을 뿐 아니라, 입양을 받지도 않는다는 사실을 객관적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저는 바로 이 점이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서로 다른 가르침으로 인해 사회에 표면적으로 나타다는 가장 큰 차이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에베소서 1장 3에서 7절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7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기독교는 기본적으로 죄사함으로 얻는 구원의 은혜종교입니다. 바로 이 구원의 ("거저 주시는") 은혜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전하신 복음의 핵심입니다.
동양의 구원관은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이라"는 말로 설명이 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인간"이 아무리 지성으로 노력해도 복음 없이는 하늘을 감동시킬 수 없다고 가르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지성이라야 감천이라"는 것이 복음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寶血) 없이는 인간의 그 어떤 노력으로도 하나님의 용서를 얻어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복음의 진수(眞髓)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즉, 육신으로 오신, 삼위일체 하나님 중에 한 분)이시라는 사실을 전제로 미리 알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유일한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인 인간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분노의 대상이 되시어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을 대신 당하셨으며, 그로 말미암아 죄인인 인간으로 하여금 속죄(贖罪:Propitiation)를 받게 하셨다는 것이 복음의 핵심적인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이슬람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예수 그리스도는 마리아의 아들이자 하나님의 선지자로써..." 코란 4:171) 그러다 보니,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 즉 가장 숭고한 입양의 의미에 대해 무지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다음편에서 계속.....
샬롬!
j.w.s.
세계 입양 통계조사 자료 출처: http://www.aican.org/statistics.php?region=0&type=receiving
코란 한글 번역본 출처: http://www.islamkorea.com/
코란 영어 번역본(의역) 출처: http://www.submission.org/suras/sura4.htm
이슬람에서는 왜 양자를 금할까?
이만석 중동선교회(MET, Middle East Team) 부회장
92년도 - 93년도 보스니아 무슬림들이 세르비아인들에게 비참하게 핍박을 당할 때의 일이다. 이란의 국영방송에서는 연일 TV를 통해서 보스니아 무슬림 어린 아이들이 죽은 부모님들의 시체 옆에서 울부짖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 비참한 광경을 보다가 마음에 감동을 받고 그들을 돕고 싶은 마음이 솟구쳐 오르는 것을 참지 못하여 내가 잘 아는 한 이란인 기독교인이 그 아이들 중에서 몇 명을 양자로 삼아 평생 그들의 양육을 책임지겠다고 이란 국영방송국에 연락을 했던 일이 있었다.
나는 방송국에서 그의 제안을 대단히 기뻐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전혀 뜻밖의 연락을 받았다고 한다. 아무리 그 어린이들의 상황이 어렵다고 하더라도 기독교인에게는 무슬림 자녀를 양자로 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그런 것인 줄 알고 있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것이 아니었다. 물론 이슬람에서는 기독교인들에게는 절대로 양자를 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양자 제도 자체를 부인하는 것이었다.(코란 33장38절 주석, 이슬람 국제출판국, p788)
아니 이슬람의 창시자 무함마드에게도 자이드(Zaid)라는 양자가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양자 제도가 없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좀 궁금해서 관련 자료를 뒤져가며 알아보았다. 친절하게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한글 코란에도 장황하게 설명을 붙여놓고 있었다.
그 내용을 읽어 보니 자이드(Zaid)라는 노예 출신인 무함마드의 양자가 자이나브(Zeinab)라는 아름다운 귀족 여인과 결혼을 했는데 신분이 맞지 않아서 불화가 잦았고 결국 이혼했는데 이혼하자 무함마드가 며느리였던 자이나브를 자신의 아내로 취했다는 것이 한글 코란의 주석었다.
호마 다라비 박사(Dr. Homa Darabi)는 이 사건이 무함마드가 자이나브와 결혼하기 위해서 자이드에게 이혼을 요청했고 이혼하자 곧 그녀와 결혼하고자 하였으나 종족들의 반대에 부딪힌 무함마드는 알라의 계시를 받았다고 하며 며느리와 결혼한 것이라고 해석한다. (Prophet Mohammad even asked his own adopted son, Zaid Ebn Hares, to divorce his wife, Zeinab, so that he could marry her. When the members of tribe protested this marriage, because the daughter-in-law was considered like one's daughter. Mohammed answered that he received a revelation from Allah, that "A Moslem man cannot adopt another man's child." Hence Zaid was not his real son, therefore he could marry his adopted son's wife. 출처: http://www.homa.org/)
국어로 코란을 번역한 김용선 박사도 이 구절에 대해서 “자이드의 아내 자이나브는 아름다운 여자로 무함마드가 마음 속으로 사랑하고 있었는데, 추문을 겁내어 자이드의 이혼을 누르려고 했다. 그 후 자이드가 이혼했으므로 무함마드는 자이나브를 아내로 맞았다. 그가 남의 처를 취했다는 비난에 대하여, 양자의 처가 이혼하면 양부가 재혼해도 정당하다는 코란이 계시되었다.”고 주석하고 있다.(한글판 코란 김용선 역 33:37절 주석. pp440-441) .....계속
ⓒAll rights reserved by MET, Middle East Team
라마단 특집: 이슬람의 도전 그리고 기독교적 숙고 1
이번 라마단 기간 동안 크리스천들은 무슬림들의 그릇된 세계관과 종교의식을 비판하기 보다는 크리스천 내부, 특별히 미국에 있는 한국인 크리스천으로써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이슬람교 인구의 팽창으로부터 오는 도전에 비추어서 기독교의 기본진리에 대하여 깊이 성찰해보는 기회로 삼았으면 합니다.
저는 요즘, 이슬람교 사회의 가정중심적인 신앙관에 의해 기독교 사회가 오히려 도전을 받고 있다는 말을 매우 자주 듣고 있습니다. 아마도, 기독교 인구가 문화적 주류를 이루고 있거나 또는 이미 탈(脫)기독교화 된 사회에서 동일하게 나타는 현상 중에 이혼, 낙태, 성(性)관계 및 성(性)개념의 타락 등 가정문제에서 비롯되는 일련의 사회적 폐해문제와 비교해 보았을 때 이슬람권 사회가 상대적으로 깨끗하다는 의미인 것 같습니다. 전혀 틀린 말은 아니라고 여겨집니다. 그래서 최근 한국이나 미국의 기독교계에서는 기독교인의 가정불화 문제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가족의 가치를 회복하기 위해 적극적인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미국에서 현재 진행중인 동성 간 혼인 합법화를 거부하는 주민발의법안 제8호(Proposition 8)에 대한 치열한 사법권적 공방이 그 한 예라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낙태나 동성연애 문제를 기본적으로 가정문제로 보고 있는 미국 기독교계의 반응의 초점이 무엇인가 빗나가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저는 그 생각을 설명해보고자 합니다.
먼저, 저는 찰스 콜슨(Charles Colson)이나 티모디 죠지(Timothy George)와 같은 분들이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는 맨하탄선언(Manhatthan Declaration: http://www.manhattandeclaration.org/)과 같은 크리스천 시민단체 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지합니다. 이 글을 읽게 되실 모든 분들에게도, 미국의 '생명윤리와 성윤리 그리고 종교의 자유'의 본지(本旨)를 회복하기 위해 활동하고 있는 "맨하탄선언"에 참여해주실 것을 요청합니다.
그러나 제가 오늘 미국에 사는 한국인 크리스천들에게 말씀드리고자 하는 부분은, 그보다 더 깊은 차원의 기독교적 숙고가 필요한 부분입니다. 우선, 아래 도표를 한 번 살펴봐 주십시오.

위 도표를 통해 표면적으로 알 수 있는 점은, 우선, 카자흐스탄을 제외한 대부분의 이슬람권 국가에서는 어린아이들을 해외로 입양을 보내지 않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2001년까지, 한국이 미국으로 입양을 보내는 3위 국가라는 점이 눈에 들어옵니다. (2009년까지 조사된 통계조사에 따르면, 조사기관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한국은 여전히 3, 4위를 오르락 내리락 하고 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정말 이상한 일입니다. 올 11월에 있을 G20 개최국이며, 한류라는 명목하에 세계적인 문화콘텐츠를 국제사회에 수출하고 있는 장차 일품국가 대한민국은 자국의 어린아이들을 해외로 입양을 보내는 부문에서도 역시 세계적인 수준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출산율 세계 185위(1000명 당 8.93명, 2009년 미국 CIA 공식조사)라는 점과 동시에 전체 인구의 1/4이 기독교인이라는 점을 감안해보면,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출산, 낙태, 이혼, 동성연애 등의 문제도 중요하지만, 사실 지금 한국교회 사역자들이 우선적으로 돌아봐야 할 점은 입양의 복음적 의미를 실제적으로(행동으로 옮길 수 있을 만큼) 깨닫지 못하고 있는 한국인 크리스천들의 영적 지평이 열리도록 도전해야 한다는 점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입양과 복음이 무슨 관계가 있는지 조금더 구체적으로 생각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다음편에서 계속.....
샬롬!
j.w.s.
세계 입양 통계조사 자료 출처:http://www.adoptioninstitute.org/FactOverview/international.html
세계 출산율 관련 자료 출처: https://www.cia.gov/library/publications/the-world-factbook/index.html
[Why] 8년만에 찾은 아들 눈물로 외면한 부모
부산=윤주헌 기자 calling@chosun.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입력 : 2010.06.12 02:56 / 수정 : 2010.06.13 14:25
경찰이 8년 전 실종됐던 지적장애아를 찾았으나 부모가 상봉을 거부하는 바람에 다시 보호시설로 돌아가는 안타까운 일이 벌어졌다. 연합뉴스 5월 25일
윤모(20)씨는 정신지체 2급이다. 그는 2000년 7월 22일 대구시 달서구의 한 길가에서 발견됐다. 경찰이 부모를 찾아주려 했지만 허사였다. 말로 의사표현을 하기도 힘들고 사고 자체가 잘 안 되기 때문이다.
보호소에서는 윤씨에게서 DNA를 채취했다. 부모가 나타나 윤씨를 찾으면 식별할 수 있는 단서가 DNA뿐이었다. 하지만 아무도 그를 찾지 않았다. 시간은 계속 그렇게 흘러 윤씨는 대구의 한 재활병원에서 살았다. ....계속
8.02.2010
찬양, 그리고 회상(回想)
8월 8일 오후 6시에 "해바라기와 최덕신이 함께 하는 듀오 콘서트(Duo Concert)"라는 찬양집회가 시애틀형제교회에서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1990년대, 시애틀 지역에서 십대 청소년기를 보낸 현재 30대 이상의 1.5세 크리스천이라면 누구나 '주찬양' 팀과 최덕신집사가 이 지역에 뿌린 하나님을 향한 찬양의 열정을 잊을 수 없을 것입니다.(나중에 최덕신집사를 따르던 서북미 지역의 1.5세들이 남가주 엘에이 지역에 '주블리교회'라는 한인교회를 시작했는데, 그때 시애틀에 있던 청년 몇몇은 아예 남가주 지역으로 이사를 가기도 했습니다.) 누구보다 제 자신이 그렇습니다.
당시 저는 고등학생이었는데, 하루에 담배 2갑은 보통이었고, 술이나 대마초 그리고 그 외에 지금의 저로써는 머리 속에 떠올리는 것 자체가 부끄러운 방탕한 생활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1995년 여름, 때마침 학교에서 일어난 폭력사건에 연루되어 6개월간 유기정학을 받은 저는, 저보다 2살 연상인 교회 누나의 적극적인 기도와 인도로 살아계시는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참고로 저는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교회를 다녔다고 해서 모태신앙-크리스천입니다.)
그때 그 누나는 술, 담배, 폭력 그리고 마약 등 타락한 세상의 온갖 오물에 찌들어 있던 제 영혼의 회복을 위해 지속적으로 좋은 찬양 테이프를 빌려주거나 선물해주곤 했습니다. 물론 저는 속으로 몰래 짝사랑하던 그 누나가 지켜보는 앞에서 듣는 척만 했을 뿐이지만 말입니다.
그러던 중에 어느 순간(이 '어느 순간'의 의미에 대해서는 나중에 자세히 설명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나 자신의 적나라한 연약함과 죄문제를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제 자신의 죄에 대한 주체할 수 없는 부끄러움에 정말 쥐구멍에라도 숨어 들어가고 싶었습니다. 그런 저에게 위로와 믿음의 바탕을 제공해준 것이 바로 찬양입니다.
몇 년 전에 YWAM-AIIM이 개최한 워십컨퍼런스에 강사로 오셨던 게리 페럿(Gary A. Parrett, Gordon Conwell Theological Seminary 예배학 교수) 목사님은 현대 찬양 사역자들은 반드시 신학적 훈련과정을 거쳐야 함을 강조하셨습니다. 그만큼 기독교인의 영성에 있어서 찬양의 위치와 역할이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정말 찬양은 영원한 생명이란 무엇인지 그 섬광(閃光)을 뚜렷하게 비춰주는 통로와도 같습니다.제가 제 자신의 죄문제와 그로인한 수치심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을 때, 예전에는 별 의미도 없이 그저 서랍속에 보관되어 있던 찬양 테이프들은 성령님께서 사역을 하실 수 있는 가장 좋은 통로가 되어 주었습니다. 그 중에 제일 많이 듣던 찬양 테이프가 바로 『주찬양 6집』이었습니다. 지금도 그 멜로디만 들어도 타임머신을 탄듯 15-6년 전의 상황으로 저를 이끄는 곡이 있다면 "너는 내 것이라"라는 송명희 씨가 작시하고 최덕신 씨가 곡을 붙인 찬양입니다.
그 후 저는 빠른 속도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된 삶을 배우기 시작했지만, 최덕신집사님에 대한 좋지 않은 소식이 공개되게 되면서 저와 몇몇 친구들은 주찬양팀에서 만든 찬양집을 모아서 한꺼번에 버리기도 했습니다. 정말 슬픈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과연 최덕신집사님을 원망하고 그의 죄인된 행동에 대해서 실망을 할만큼 저와 제 친구들이 거룩하고 경건했는냐?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최집사님에 대한 듣기에도 민망한 소식으로인해 마음 속의 우상과 비전이라는 야릇한 단어로 포장되어 있던 참으로 유치하고 인간적인 야망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을 뿐입니다. 어쩌면, 최집사님으로 하여금 자신의 정욕이 흘러가는대로 방치해두신 것 역시 하나님의 은혜의 영역에 속한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해봅니다.
이제 저는 30대 청장년에 속합니다. 그때 저에게 주찬양 6집 테이프를 선물해주었던 연상의 여인은 제 3살짜리 아들의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지금의 저에게 있어서 세상에 살아있는 인간이 부를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노래는 아마도 주님의 은혜를 노래하는 '회개한 죄인'의 신앙고백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http://www.youtube.com/watch?v=0xUG_WD_kOI
6.23.2010
로마서 12장 20-21절 말씀과 북한 문제
생각 1.
죠지 W. 부시 미국 前 대통령이 간증자로 초대된 <6.25 전쟁 60주년 평화기도회>로 인해 진보적인 기독교계에 큰 파장이 일고 있는 가운데, 李萬烈 前 국사편찬위원장을 주축으로 한 여러 좌파 성향의 기독교 단체들이 모여 『조지 부시 초청 6.25 전쟁 60주년 평화기도회를 우려하는 기독인 연합』이라는 불필요하게 긴 이름의 단체를 형성하는 등, 때아닌 反부시 운동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뉴스앤조이> 기사에 의하면, 이들의 움직임 중에 『'참평화'가 무엇인지 논하는 토론회』가 끼어 있다는 점입니다. 부디 이런 토론회를 통해서 한국의 좌파적 기독교계가 진정한 평화가 무엇인지 진지하고 허심탄회(虛心坦懷)하게 논하고 깨닫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예상컨대, 앞으로 모이게 될 『'참평화'가 무엇인지 논하는 토론회』에서는 십중팔구 로마서 12장 14-21절 말씀을 근거로 정부 차원의 對北 식량지원은 물론이요, 이명박 대통령은 김정일을 무조건 만나 정상회담을 해야 한다는 식의 케케묵은 평화지상주의적(平和至上主義的) 논리가 또 나올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이런 발언은 지난 17일에 있었던 <민족의 화해와 평화를 위한 종교인 모임>에서 이미 나온 개념입니다. 아이러니 한 것은, <민족의 화해와 평화를 위한 종교인 모임>과 <6.25 전쟁 60주년 평화기도회> 사이에 양다리를 걸치고 있는 교계 지도자들이 많이 있다는 점입니다. 대략 5년 전에 있었던 <제3회 열린한민족포럼>에서 이만열교수님이 직접 『한국교회는 진보와 보수를 떠나 북한을 지원함과 동시에, 보편적 진리와 사실에 근거한 비판을 하는 등 다각적인 역할 분담을 감당해야 한다』라고 발언하셨던 내용이 새삼스레 다시 생각납니다.
생각 2.
북한 문제와 관련하여 로마서 12장 20~21절 말씀에 대한 생각을 간략하게 덧붙이겠습니다.
로마서 12장 20,21절에 보면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참으로 진리 중에 진리입니다. 이 말씀 자체에 대해선 진보든 보수든 구분이 있을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누가 우리의 원수냐는 것입니다. 국가적인 차원, 민족적인 차원, 보편적인 생명논리의 차원에서 우리 한국 기독교인의 원수는 김정일과 그에 동조하는 정권지배계층이지 애초부터 북한의 일반 주민들은 우리의 원수가 아닙니다. 어떤 분은 김정일은 사탄이지 원수라고도 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만, 제 생각에는 김정일은 사탄의 지배하에서 惡의 씨종 노릇을 하고 있을 뿐 사탄 자체는 아닙니다. 그러므로 '원수'는 김정일이가 분명합니다.
그런데 지금 김정일이 굶주리고 목이 마른 상태입니까? 아닙니다. 김정일은 지금 당뇨나 뇌졸중 문제로 어쩔 수 없이 식사조절을 해야 할 뿐, 여태껏 한번도 굶주리거나 목마른 적이 없습니다. 또한, 그 주위의 정권지배계층 역시 아주 배부르게 잘 지내고 있습니다.
지금 북한에서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은 '배부른 원수'가 아닌 '굶주린 우리의 형제들'입니다!
늑대와 같은 '배부른 원수'들에게 도중에 빼앗기지 않고, 어떻게 힘없고 기댈 곳 없는 북한의 일반 주민들에게 직접 식량을 전달해줄 수 있느냐? 이 문제에 대해 머리를 맞대고 토론하는 것이 진정한 "참평화"에 대해 논하는 모임이 되지 않을까 여겨집니다.
6.12.2010
추천하는 영화: Five Minutes of Heaven

1990년대 중후반까지 미국 연방수사국(FBI)에서 가장 골치아퍼한 테러조직이 흑인이나 히스패닉 또는 무슬림 계통이 아닌 백인계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요즘은 거의 없어지다시피 했지만, 미국에서 가장 결속력(結束力)이 강하고 지능적으로 치밀한 테러를 일으키던 범죄조직은 백인계로 이루어진 아일랜드 출신 갱조직이었습니다.
아일랜드 출신 갱조직이 이처럼 강한 결속력으로 뭉치게 된 배경에는 최근까지 이어져온 영국령 북아일랜드(얼스터:Ulster)와 아일랜드 사이의 분쟁문제가 있습니다.
지난 2005년 10월, 비로소 아일랜드공화국군(IRA)이 공식적으로 무장해제를 확인받은 이후 북아일랜드와 아일랜드 사이의 갈등은 거의 수그러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아일랜드계와 아일랜드계 사람들 사이의 기억의 문제는 역사평가의 장으로 쉽게 넘어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 북아일랜드와 아일랜드 사이의 분쟁사(紛爭史)에 대해 본격적인 평가를 하기 위한 문화-사회적 분위기가 먼저 조성되고 있는듯 합니다. 그런 분위기의 일환으로, 영국 영화계에서는 IRA(Irish Republican Army: 아일랜드 공화국군)이나 UVF(Ulster Volunteer Force:얼스터 의용군) 등의 무장투쟁의 역사를 회상하는 인생담을 소재로 한 작품들이 속속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 한편 소개하겠습니다. 영화 "쉰들러스 리스트 (Schindler's List)"에서 오스카 쉰들러 역을 맡았던 리암 니슨 주연의 "Five Minutes of Heaven"이라는 작품입니다.

영화는 1975년 2월 북아일랜드에서 시작됩니다.
17살의 젊은 UVF 단원인 알리스테어 리틀(리암 니슨)은 그릇된 민족의식과 영웅심리에 도취되어 아일랜드계 가톨릭 신자인 지미 그리핀을 사살하기 위한 암살계획을 세웁니다. 알리스테어는 집에서 TV를 보며 한가로운 저녁시간을 보내고 있는 지미 그리핀을 찾아내고, 그의 어린 동생 조 그리핀(제임스 네스빗)이 지켜보는 앞에서 그를 저격합니다.
그후 알리스테어는 체포되어 12년간 감옥생활을 하게 되고, 나중에야 비로소 그때 자신의 저격장면을 바라보고 있던 그 어린 소년이 바로 지미 그리핀의 친동생이라는 사실을 알게됩니다. 그는 세월이 지나 성숙해질수록 어린 조의 겁에 질린 두 눈동자를 잊지 못하고 죄책감에 괴로워하게 됩니다.
한편, 자기 형이 저격 당하는 모습을 목도(目睹)한 조 그리핀은, 형을 구하려는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고 멀뚱하게 바라보고만 있었다는 이유로 자신을 힐난(詰難)하시던 어머니의 책망의 눈빛을 평생 잊지 못하고 역시 죄책감에 시달리게 됩니다.
그리고 그 사건이 일어난지 33년이 지난 현재, 어느 TV 프로그램 기획진이 "진실과 화해"라는 주제로 알리스테어와 조의 5분간의 만남을 계획하게 됩니다. 각종 전문가들에 의해 기획되고 진행되는 이 둘의 만남은, 불행히도, 실패로 끝나게 됩니다. 이 짧은 만남을 통해 지난 33년간의 원한을 되갚으려고 몸에 칼을 차고 있던 조가 문 앞에서 도망가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둘은 기획한 것이 아닌 진정한 "화해"의 방법을 찾게 됩니다.
"Truth and reconciliation!" 이 영화에서 수차례 반복되어 강조되는 대사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영화에서 강조하고 있는 "truth"의 진정한 의미는, 역사의 기억을 파헤치고 폭로하는 과거사 청산이 아니라 것입니다. 나 자신의 마음의 문제에 대하여 진실하게 용서를 구하고, 용서할 수 있는 용기를 이 영화는 "truth"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5분간의 천국, 이것은 나 자신의 '쓴뿌리'를 발견하고 이 쓴뿌리를 뿌리째 뽑아내기 위한 단호한 결단을 내리는 그 순간을 묘사한 비유입니다.
마음의 문제, 오랜 쓴뿌리를 아직 품고있는 우리 모두에게 영화 "Five Mintues of Heaven"을 적극 추천합니다.
예고편: http://www.youtube.com/watch?v=uZOE7HgvI3c
(영화는 동네 비디오집이나 Red Box에서 빌리실 수 있습니다.)
6.08.2010
지금 북한선교를 위해 할 수 있는 일(행동)
오늘 저녁시간엔 북한선교에 헌신하신 K선교사님과 진지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저 자신에게 있어서 K선교사님과 나눈 대화의 시간은, 요즘처럼 부쩍 북한선교의 길이 어둡고 불가능해 보이는 이런 때에, 북한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기도하는 중보자들이 할 수 있는 일(행동)은 무엇인지 고민하게 하는 시간이었습니다.
K선교사님과의 대화 이후, 집으로 돌아오는 먼 길을 운전하며 다시 한 번 생각을 정리해보았습니다. 그래서 몇가지 적어보겠습니다.
첫째, 미국에서 할 수 있는 북한선교의 방법에 있어서 친북파를 통한 평양방문 노선을 과감하게 끊고, 그동안의 친북적 선교방식에 등을 돌려야 합니다. '등을 돌린다'는 말의 의미는, 그동안의 시도와 경험에 대해 진지하게 반추해보며 비판할 것은 분명하게 비판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 부분에서 중요한 것은, 소위 친북파로 분류되는 북미나 남미 지역의 이민자들을 아예 사랑하지 말자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만 그 사랑의 방식이 무조건적인 관용이 아닌, 반복적인 거짓에 대해선 분명하게 꾸짖어 반성케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툼이 일어날까 두려워 마약중독에 빠져있는 형제의 문제와 대면하지 않고 그저 충돌을 피할 뿐이라면, 그 것은 무책임한 것이지 사랑은 아닙니다. 진심으로 그 형제를 사랑한다면 '마약과의 전쟁'까지 선포할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친북파에 대한 교계의 입장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동안 친북파를 통한 북한선교방식을 이어왔던 사역자들은 자존심도 상하고 어쩌면 스스로에 대해 기회주의자라는 자책을 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더이상 친북적 노선을 유지하게 된다면 앞으로 비판의 화살을 피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예를 들어, 평양방문을 위해 북한정부에 쥐어줘야 했을 자금의 액수와 흐름에 대해 교계에서 본격적인 의심과 추궁이 시작된다면 큰 낭패를 보게 될 것입니다. 이제는 선교단체도 지역사회의 투명성 요구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둘째, 영적인 문제와 인권문제는 분리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북한선교의 실제적 사역에 있어서도 영적인 문제와 인권문제를 통합해야 합니다. 기독교인에게 함께 모여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영적인 교제를 할 수 있는 자유는 그어떤 인권보다 우선적으로 보장받아야 할 권리입니다. 또한 하나님께 (작은 소리든 큰 소리든) 소리내어 영광을 돌리는 찬양 역시 기독교인의 영성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영적인 행위입니다. 이처럼 인권문제를 등한시한 채 영적인 문제에 대해 논한다는 것은 어쩌면 영지주의적 영성을 추구한다는 의미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셋째, 경제특구를 통한 북한주민들에게 접근하는 선교방식 역시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합니다. 물론 경제특구에서 진행되고 있는 다양한 사역은 매우 귀하며 분명히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안에서 선교사들에게조차 말을 할 수 있는 자유가 제재되고 있는 현실에 대해 북한정부와 당당하게 맞설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할 수 없다면, 그 사역 자체의 목적이 하나님 나라를 전하는 "선교"인지 아니면 박애주의적 자비(慈悲)활동인지 애매모호함을 극복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자비활동 역시 의미있는 일입니다.
마지막으로, 북한에 대한 각자(各自)의 부르심이 어떤 방향이냐와는 상관없이 북한선교에 헌신된 모든 그리스도인은 북한의 정치범수용소 등에 갇혀있는 그리스도인 형제자매들에 대해 평상시에 끊임없이 기도하고 세상에 말로써 전해야 합니다. 어쩌면 이 일(행동)이 지금 북한선교를 시작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또한 탈북자들과의 개인적인 경험이나 관계가 어땠느냐와는 상관없이, 탈북자들이 중국에서 당하고 있는 인권유린 실상에 대해 만나는 사람들에게 기회만 되면 설명하고 알려줘야 합니다.(관련기사: "한 번 脫北(탈북)한 사람은 꼭 다시 탈북한다" ) 지나치게 감성적인 간증을 들려줄 것이 아니라, 탈북자들이 당하고 있는 현실에 대해 객관적인 사실부터 알려야 합니다.
요즘 미국 이민 1.5세들에게 북한선교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가장 힘든 부분은, 이미 충분히 피곤하고 바쁜 이민생활 중에 북한 문제에 시간과 마음을 할애하여 생각하는 것 자체를 스트레스로 여기고 있다는 문제가 아닐까 싶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각 개인에게 문제가 있다고 할 수는 없겠으나, 전체적인 관점에서 볼 때 큰 공동체적 죄를 짓고 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어 보입니다.
샬롬!
j.w.s.
5.28.2010
(펌) 조갑제 대표, "2만4300여 명의 한국 전쟁고아를 入養시킨 스칸디나비아 3國"
한국여성정책 연구위원 이미정씨의 논문에 따르면 1953년부터 2008년 사이 이루어진 海外입양 중 미국으로 입양된 아동의 수는 총 108,222명으로 전체의 3분의 2를 구성하고 그 다음이 프랑스 11,165명, 스웨덴 9,297명, 덴마크 8,702명, 노르웨이 6,295명 순서로 나타나고 있다(보건복지가족부,2009)고 한다.
<미국 국무부 공식 통계에 의하면 1948년에서 2004년 사이에 총358,538명의 海外입양이 미국內에서 이루어졌는데, 유럽과 오세아니아에 입양된 14만-15만 명을 더 한다면, 全 세계적으로 총 49만-50만 건의 海外입양이 발생했음을 알 수 있다(이삼돌, 2008). 이 중 한국아동이 海外입양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세계전체의 1/3 수준이다.
미국 다음으로 해외입양을 많이 수용하는 나라는 스웨덴으로 세계 130개국에서 45,000명을 입양하였는데, 인구 비율로 보면 세계 최대 입양국이다(이삼돌, 2008). 미국 내에서도 스칸디나비아系 미국인들이 해외 입양을 많이 받아들이는데, 미네소타주에는 15,000-20,000여명의 한국아동이 입양되었는데, 이 수치는 미네소타주에 거주하는 한국인의 절반 수준에 달한다(이삼돌, 2008).>
스칸디나비아 3國, 즉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는 6.25 전쟁 때 의료지원단을 보냈다. 국립의료원은 그들이 지어준 병원이다. 이 세 나라의 인구는 합쳐서 2000만 명 정도이다. 이 세 나라가 '새 아들 딸'로 받아들인 한국의 전쟁고아들은 2만4300여 명이다. 노르웨이는 약400명의 탈북자들을 받아들였다. 아직도 고아들을 외국으로 入養시키는 우리 한국인으로선 머리가 숙여질 따름이다.
[ 2010-05-28, 12:27 ] 조회수 : 247
기사출처: http://www.chogabje.com/board/view.asp?C_IDX=32992&C_CC=AZ
3.14.2010
길태, "길에서 태어난 아이라는 의미"
얼마전까지 한국어로 된 대부분의 인터넷 언론매체들은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김연아 선수에 대하여 온갖 아름다운 극찬으로 가득찬 기사를 서로 다투어 게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며칠 지나지 않은 지금 인터넷 지면은, 마치 언제 그랬냐는듯, 부산에서 일어난 소위 '김길태 사건'으로 거의 도배되다시피 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이란 참으로 변덕스럽기 그지없는 것 같습니다. 김연아 선수가 빙판 위에서 마치 한 마리 우아한 백조처럼 춤을 추는 모습을 보고 있을 때만 해도 인간의 아름다움과 완전함에 대한 감탄으로 꽉 차 있던 마음이, 동일한 인간인 김길태에 대해서는 참을 수 없는 분노와 추잡한 느낌들로 경악을 금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사진출처:연합뉴스오늘 필자가 김길태 사건에 주목하게 된 이유는, '김길태'라는 이름을 인터넷으로 검색을 하던 중에 김길태의 이름을 한자로 표기해주는 인터넷판 신문이 전혀 없다는 점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김연아(金姸兒) 선수의 한자어 이름에 대해서는 "예쁜(姸) 아이(兒)가 금(金) 메달을 딴 것"(조갑제닷컴)이라는 해석까지 나와있는 반면, 김길태의 이름에 대해서는 "길태라는 이름은 고아, 즉 길에서 태어난 아이라는 의미"(위키백과)라는 참으로 안타까운 추측만 나돌 뿐입니다. 실제로 어린 김길태는 태어나자마자 친부모에게 버림을 받았고 양부모의 손에 입양돼 길러진 고아입니다.
분명히 '김길태 사건'은 양심을 지닌 인간이라면 그 누구도 함부로 긍휼을 말하거나 용서에 대해서 논할 수 없는 참으로 잔혹하고도 파렴치한 비인도적(非人道的) 범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아래 기사를 읽으며 김길태의 불쌍한 삶에 대하여 통감(痛感)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김길태는 인간으로써 가장 기본적이며 중요한 권리인 친부모로부터의 아낌없는 사랑을 제대로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아래 기사는 조선닷컴에 실린 김길태의 성장과정에 대한 기사의 일부분입니다.
『김길태(33)는 삶과 범죄 행태가 통상적이지 않아 행동을 예측하기 어려운 인물이다.//그는 30여년 전 부산 사상구 주례동 한 교회 앞에 버려졌다가 현재의 부모를 만나 입양됐다. 경찰은 "김길태의 양부모는 이미 자녀가 있었지만 2세 정도밖에 되지 않은 아기가 불쌍해 거둬들인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김길태는 그러나 1994년부터 절도 혐의로 소년원을 드나들기 시작했다. 다니던 부산의 한 상업계 고교는 1년도 안 돼 중퇴했다. 이후 폭행·절도·성폭행 등 범죄를 반복했다. 1997년 성폭행 미수로 3년을 교도소에서 살았고, 2001년 부녀자를 10일간 감금하고 폭행해 8년을 복역했다. 2009년 6월 출소했지만 지난 1월 20대 여성을 성폭행하고 감금한 혐의로 수배 중이다.』 (조선닷컴, 입력 2010.03.08 21:23)
가슴에 손을 얹고 정직하게 말해서, 이 글을 쓰고 있는 필자는 나 자신이 김길태보다 더 인간다운 인간이라 감히 자신있게 말할 수가 없습니다.
필자는 1979년도에 서울에서 태어나 건대입구 근처 송정동에서 성장했으며, 중학교 때부터 화양리 건달 패거리와 어울리며 온갖 양아치짓을 했습니다. 그러다 부모님을 쫓아 미국으로 이민을 왔고, 미국에 와서는 마약을 파는 월남계 갱단과 어울리며 다른 아시안계 청소년들에게 마약을 권하면서도 정작 저 자신은 마약을 철저하게 경계했습니다.
심지어 강간, 폭행, 살인미수 등의 사건이 일어나는 장소에 있었으면서도, 단 한 번도 그와같은 범죄행위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말리거나 신고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와 같은 범죄행위에 동조했으며, 그와같은 범죄행위의 원인을 제공하기도 했습니다.
필자의 경험에 의하면 흉악범은 그렇게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성장하며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절도에서 폭행, 폭행에서 강간, 그리고 살인 등의 순서로 범죄의 질은 점점 더 악해집니다. 만약에 필자가 고등학교 11학년 때(1996년) 주님의 강권적인 은혜를 체험하지 못하고, 주님을 주인으로 모시지 않았다면, 그 후에 알게된 제 출생에 관련된 충격적인 사실을 감당하지 못하고 지금쯤 저는 김길태 이상으로 흉악한 범죄자가 되어 있을지도 모릅니다.
사진출처: 조인스닷컴그러므로 필자는 '김길태 사건'에 대하여 분노와 경악을 금치 못하면서도, 동일한 죄인으로써 자신을 조금도 더 나은 인간으로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왜 저에게는 은혜를 베푸시어 흉악한 살인범, 강간범, 도둑놈이 되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이렇게 붙잡아 주셨는지, 오직 빚진 마음을 고백할 수 있을 뿐입니다.
결론입니다. 오늘 제가 '김길태 사건'과 제 자신의 과거를 관련지어 회상하고 있는 진정한 이유는 역시 중국에 흩어져 있는 탈북고아들에 대한 마음이 간절하기 때문입니다.
중국 대련 모 고아원에 방문했을 때, 한국아이 한 명이 있었습니다. 그 아이는 한국인이면서도 한국인이라 말할 수 없었고, 다른 중국아이들 사이에서 가장 소외되고 외로워 보였습니다. 그 아이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끝내 아무도 그 아이에게 친아빠, 친엄마가 되어주어 아낌없는 사랑을 부어주지 않는다면, 세상은 그 아이를 "길태" 즉 "길에서 태어난 아이"라 부르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탈북고아 한 명 한 명에 대하여, 우리 모두가 함께 책임을 통감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샬롬!
j.w.s.
2.25.2010
한국인의 의식수준 革新(혁신)에 대하여
필자의 관점에서, 김민정 선수와 선린린 선수가 서로 부딛치는 장면에서 김민정 선수가 오른쪽 팔을 살짝 들어 올려 중국 선수의 얼굴을 건드린 행위를 반칙으로 보기에는 애매모호한 점이 없지 않고, 그 순간 구지 그런 반칙을 사용하지 않았더라도 충분히 금메달을 획득할 수 있어 보였습니다. 다만,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김민정 선수의 오른쪽 팔에 중국 선수의 몸이 건드리져지자 김 선수의 오른쪽 손과 팔이 불필요할 정도로 민감하게 반응했다는 사실만은 부인할 수 없어 보입니다. (물론 냉정한 스포츠 경기라는 점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다소 이기적으로 보이긴 했습니다.)
한편, 이번 판정을 내린 호주 출신 제임스 휴위쉬(James Hewish) 심판이 "2002년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 쇼트트랙 남자 1500m에서 1위로 결승선을 통과한 김동성에게 실격판정을 내린 적이" (조선일보) 있는 바로 그 문제의 심판이라는 사실 때문에 한국 인터넷 언론매체들은 뜨겁게 논란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번 판정 문제에 대하여 생각이 깨어있는 한국인들이라면 조금 진정하고 한 번 진지하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사진출처: 동아닷컴
동계올림픽은 하계올림픽과는 달리 가난한 후진국가에서는 출전 자체를 어려워하고, 출전하더라도 거의 빛을 보기 어려운 소위 선진국가들만의 축제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한국팀은 종합순위 6위를 달리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한국은 벌써 스포츠, 예술, 경제, 과학, 그리고 인권 등의 분야에서 세계 그 어떤 나라보다 빠르게 선진국 대열에 진입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번 동계올림픽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한국에 대해서 판단하고 평가하는 기준 역시 이제는 더이상 예전의 후진국에서 발전하던 시대의 것과 동일한 수준일 수 없습니다. 바로 이 점에서 한국인들의 의식수준에 革新(혁신)이 필요해보입니다.
이번 쇼트트랙 여자계주 3000m 경기에서 한국 여자팀에 실격판정을 내린 심판이 누구냐라는 문제와는 상관없이, 이미 한국에 대한 세계적인 관심이 높아졌으며 그만큼 평가의 기준 역시 까다로워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사실, 그 호주 출신 심판 만큼 한국 팀의 뛰어난 재능에 대하여 치밀하고 정확하게 분석하고 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어쩌면 그는 한국에 대해서 남다른 관심을 갖고 더욱 까다로운 기준을 적용하여 한국이 스포츠-윤리면에서도 완벽한 승자가 되길 바란다는 세계인들의 暗示(암시)를 전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지금 한국인이 패배를 대하는 의식수준은 아직도 후진국 수준으로 보일 뿐입니다. 한국인은 더이상 낡은 패배주의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됩니다. 패배의 쓴 감정을 다스릴 줄 아는 내적인 성숙함만이, 역사적 패배자라는 오래된 피해의식에서 한국인들의 의식수준을 세계 최고의 수준에 걸맞는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려 줄 수 있을 것입니다.
동일한 관점에서, 기독교인으로써의 의식수준의 혁신에 대하여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개인의 죄와 구원'의 수준에서 '사회적 죄와 공동체적 구원'을 생각할 수 있는 선교적 의식수준으로 성숙하기 위해서는, 더이상 편협한 죄의식과 오래된 상처에 머물러 있을 수 없습니다. 의식의 벽을 허물고 '사회적 죄와 공동체적 구원'의 문제를 고민하고 매일같이 기도할 수 있는 仲保者(중보자)의 선교적 영성을 추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저 개인에게 있어서 '사회적 죄와 공동체적 구원'의 문제를 놓고 기도한다는 말의 의미는, 아무도 돌보지 않는 중국내 탈북고아들을 위한 아픔과 슬픔을 제 자신이 실제적으로 느낄 수 있도록 그들을 잃어버린 친부모의 마음을 저에게도 주십사 주님께 간절히 구하는 기도를 하는 것에 있습니다.
샬롬!
j.w.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