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2014

◈제임스 패커, "개인의 거룩함에 대하여" (J.I. Packer - On Personal Holiness)


오랜만에 좋은 동영상 강의 한 편을 소개합니다.  제임스 패커(J.I. Packer) 교수님의 "개인의 거룩함에 대하여"라는 강의입니다.  성령의 능력을 추구하는 기독교-신앙-운동이 초점을 잃고 비본질적인 기복주의(祈福主義)에 빠지게 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됩니다.  한 예로, "능력전도(Power Evangelism)"라는 소위 교회성장-방법론에 지나치게 치중한 나머지, 성령(聖靈)으로 이미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을 지속적으로 추구해야 하는 본질적인 이유를 망각하는 것입니다.  평생 일관된 어조로, 청교도들이 강조한 그리스도인의 거룩한 삶의 중요성을 가르쳐 오신 제임스 패커 교수님의 목소리가 유난히 깊은 인상을 남깁니다.  샬롬!

J.I. Packer - On Personal Holiness
http://www.youtube.com/watch?v=ou4niajE_64#t=148

8.14.2013

◈Michael McClymond on Universalism: Gnosticism, Origenism, Boehmenism, and Within Modern Evangelical-Charismatic Rim


"Published on Apr 12, 2013
Time magazine, not long ago, ran a cover story 'What If There is No Hell?' that centered on Rob Bell's Love Wins. Bell's book highlights a major trend that is affecting Evangelical Churches in the US and around the world: a growing acceptance of universalism (i.e., universal salvation) as an acceptable evangelical belief. From whence does this trend arise? How and why has it taken hold? In this lecture McClymond traces this theological idea through its ancient roots and modern revival, and illuminates the fundamental theological questions that it raises, including the nature of God, human free will, the gravity of sin, and the significance of Christ's suffering. An appropriate Christian response, McClymond argues, must not settle with citing the relevant scriptures and reaffirming eternal punishment. It must include a deeper reflection on the meaning of Christ's cross and the difference between a church that preaches and practices 'costly grace' and one that preaches and practices 'cheap grace.'.

Original Source: https://www.youtube.com/watch?v=i-aZbNg_OIg

Michael J. McClymond: Associate Professor of Theological Studies, Saint Louis University


Origen of Alexandria (Origen Adamantius: 184/185 – 253/254), Jacob Boehme (Jakob Böhme: probably April 24, 1575 – November 17, 1624), Friedrich Schiller ( Johann Christoph Friedrich von Schiller: 10 November 1759 – 9 May 1805), William Law (1686 – 9 April 1761), George MacDonald (10 December 1824 – 18 September 1905), Adrienne von Speyr (20 September 1902 - 17 September 1967), Hans Urs von Balthasar (12 August 1905 – 26 June 1988)

3.08.2013

◈"종교, 믿는 것만으로 모자란다" 정진홍 서울대 명예교수



샬롬~!! 오랜만에 그룹메일 보냅니다.

지난 목요일에 개강한 <양화진 목요강좌> 동영상을 함께 공유하고자 합니다. 강사이신 정진홍 서울대 명예교수님은 한국 종교학계의 원로이십니다. 미리 귀띔을 좀 해드리자면, 기독교 신앙관이나 성경관에 관한 정진홍 교수님의 가르침은 정통 교리에서 조금 벗어나신 것 같아 보입니다. 하지만, 정 교수님의 강의를 통해 그리스도인로서 우리 자신의 신앙을 비춰보고 반추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으리라 여겨집니다.

"정진홍 서울대 명예교수:1937년 충남 공주에서 태어나 서울대 종교학과 및 대학원을 졸업하고 샌프란시스코신학교신학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세대 종교학자인 장병길 교수와 미국의 대표적 종교사가 멀치아 엘리아데를 사사하였다. 신학 일변도로 치우쳐 주변 학문에 머무르고 있던 종교학을 종교 현상을 통해 인간을 이해하는 인문학의 지위로 끌어올리는 일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정진홍의 학문적 관심은 “종교학이 자신의 언어로 종교와 종교를 포함한 인간의 문화와 그 주체인 인간을 어떻게 읽고 있는지”와 “한국의 종교문화에 대한 새로운 해석학의 전개를 기획하는 일”이었다. 99년 종교 분야에서 유일하게 위촉된 학술원 회원이 되었고, 2003년에 정년 은퇴를 하였다. 현재 서울대학교 명예교수와 울산대학교 석좌교수, 아산나눔재단 이사장, 그리고 대한민국 학술원 회원이다. 저서로는 《종교학 사설》, 《종교문화의 이해》, 《한국종교문화의 전개》, 《종교문화의 인식과 해석》, 《종교문화의 논리》, 《하늘과 순수와 상상》, 《경험과 기억》 등이 있고, 엘리아데의《우주의 역사》등의 여러 권의 번역서가 있다. " (출처: http://www.yanghwajin.re.kr/)




(아래는 양화진문화원 홈페이지에 남긴 댓글.) 

>>> 정진홍 교수님의 귀한 강의 정말 잘 들었습니다. 

물론, 소위 "정통 교의학"의 관점에서 비판하고자 한다면, 저 역시 도저히 수긍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심지어 반론을 제기하고 싶어지는 부분도 많이 있었습니다. 게다가, 정 교수님의 강의에서 '우상 숭배'로서의 종교와 '영적/합리적 예배'(로마서12:1)로서의 종교 사이의 구분을 들을 수 없었고; 문화권이기 전에 역시 하나의 종교로써 이슬람교의 근본주의 문제를 배제하시는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으며; 특별히, 신약성경에서 긍정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디아스포라(διασπορά)" 개념과 단순한 "게토(ghetto)" 개념이 강의 내용에서 서로 뒤섞여 있는 듯 하여 아쉬움이 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진홍 교수님의 지난 삶과 경험 그리고 깊은 자기 성찰을 통한 진지한 "고백"이 담겨져 있는 강의였기에, 감히, 마치 프랑스의 여류 철학자 시몬느 베이유가 무신론의 제2의 측면으로서 신(神)개념에 대한 "정화(Purification)"를 말했듯이, 교수님의 본뜻 역시 한국교회의 "정화"에 있다고 이해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정진홍 교수님의 강의를 들으면서, 문득, 우찌무라 간조 선생의 "나의 교회"라는 짧막한 글이 떠올랐습니다: 
"내게 교회가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있으므로 내게도 또한 교회가 있다. 그리스도는 나의 교회다. 그는 하나님의거룩하심같이 거룩하다. 우주의 넓음같이 넓다. 내게 그리스도가 있음으로 나는 완전한 교회에 속한 자이다." ("소감" 37쪽, 설우사) 
동시에, 칼 바르트의 <로마서 강해>(영역본)에 나오는 '성령-하나님'에 대한 매우 짧은 문장 하나가 함께 생각났습니다:
"He is completely the Other." ("The Epistle to the Romans" pg. 275, Oxford University Press) 
좋은 강의를 마련해주신 양화진문화원에 감사합니다! <<<


사진 및 정진홍 교수 소개 출처: http://www.yanghwajin.re.kr/

(참고: 사진을 클릭하시면 동영상 강좌를 보실 수 있습니다.)


1.19.2013

◈라이너 마리아 릴케, "말의 기능에 대한 일반적 무관심에 대하여"

...말의 기능에 대한 일반적 무관심에 대하여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다음과 같이 탄식한다.


나는 사람들의 말이 두렵다.

이것은 개라 하고 저것은 집이라 한다.

여기에는 처음이 있고 저기에는 끝이 있다고

사람들은 무엇이나 또렷이 말한다.


나에게 걱정되는 것은 그들의 감각적 희롱이다.

그들은 미래도 과거도 모두 안다

산도 그들에게는 이미 신기하지 않고

그들의 꽃밭과 집은 동시에 하느님과 이어져 있다.


그래서 나는 얼마 동안이라도 그들의 말과 떨어져 있으려고 경계하고 방비한다.

나는 곧잘 물체들이 노래하는 것을 듣는다.

그러나 그들이 그 물체에 손을 대면 그것은 굳어지며 입을 다문다.

그들은 모두 나의 사물들을 죽인다.


*릴케의 "구(舊)시집" 중에서.

*출처: "현대시창작입문" 구상 지음, 홍성사, 117쪽.

1.04.2013

◈"한송이 이름없는 들꽃으로"

이현주


한 송이 이름없는 들꽃으로

피었다가 지리라

바람으로 피었다가 바람으로 지리라

누가 일부러 다가와

허리 굽혀 향기를 맡아 준다면 고맙고

황혼의 어두운 산그늘만이

찾아오는 유일한 손님이어도 또한 고맙다

홀로있으매 향기는 더욱 맵고

외로움으로 꽃잎은 더욱 곱다

하늘 아래 있어 새벽 이슬 받고

땅의 심장에 뿌리 박아 숨을 쉬니

다시 더 무엇을 바라리요

있는 것 가지고 남김없이 꽃 피우고

불어가는 바람 편에 말을 전하리라

빈들에 꽃이 피는 것은

보아 주는 이 없어도 넉넉하게 피는 것은

한평생 홀로 견딘 이 아픔의 비밀로

미련 없는 까만 씨앗 하나 남기려 함이라고


한 송이 이름 없는 들꽃으로

피었다가 지리라

끝내 이름 없는 들꽃으로 지리라


*출처: <한송이 이름없는 들꽃으로> 이현주 지음

12.31.2012

◈대림절 아가서 묵상: '임'을 기다림.


2012년 대림절(待臨節: 성탄전 4주간 예수 그리스도의 성탄과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교회력 절기)도 이제 거의 끝나갑니다. 올 대림절에 저는 솔로몬의 "아가"를 읽으며 "기다림"의 의미를, '임'을 간절히 기다리는 애틋한 처녀의 심정으로, 새롭게 묵상하고 있습니다.


내 사랑하는 자가 자기 동산으로 내려가

향기로운 꽃밭에 이르러서

동산 가운데에서 양 떼를 먹이며

백합화를 꺾는구나


나는 내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고

내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으며

그가 백합화 가운데에서 그 양 떼를 먹이는도다


<솔로몬의 아가> 6장 2, 3절





"당신의 눈에 부딪칠 때"

박 두 진(朴斗鎭, 1916년 3월 10일 ~ 1998년 9월 16일)


아무 데서나

당신의 눈에 부딪칠 때

타올라 미쳐 뛰는

내 안의 마음이

잔잔하고 푸른 강으로

가라앉게 하소서.


아무 데서나

당신의 눈에 부딪칠 대

노루처럼 비겁한

내 안의 결단이

칼날진 발톱

사자처럼 영맹히 덮칠 수 있게 하소서.


아무 데서나

당신의 눈에 부딪칠 때

사막처럼 팍팍한

내 마음 메마름에

뜨거운 눈물

연민의 폭포강이 출렁이게 하소서.


아무 데서나

당신의 눈에 부딪칠 때

아직도 못다 올린

새 깃발을 위하여

피 흘려 넘어져도

달려가게 하소서.


<나 여기에 있나이다 주여> 박두진 신앙 시집, 77~78, 홍성사.

Originally posted on Facebook: Tuesday, December 25, 2012 at 4:26am

◈헨리 조지와 윌리암 F. 버클리.

오늘은 웬지 페이스북에 몇 글자 끄적거릴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아무도 강요하진 않았지만 굳이 불필요한 고백을 좀 하자면, 저는 개혁파 복음주의자이며 정치적으론 보수주의자입니다. 고로, 저는 기독교는 보수주의에 가깝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아주 간단하게 말해서, "자유"라는 개념 안에 "평등" 개념이 포함되어 있다고 여기며, "사회" 또는 "민족"이라는 개념보다는 "인간," "개인," "가족," "인류," "문명," 그리고 "교회(ἐκκλησία)" 등의 개념이 우선한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시장친화적 경제정책과 넓은 의미에서 선별적 복지정책이 함께 갈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물론, 말이 되는지 안되는지는 조금 복잡한 문제이지만 말입니다.

그래서, 2012년 미국 대통령선거 때에는, '유사-기독교-이단-종파' 몰몬교도인 것을 이미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미트 람니(Mitt Romney) 후보를 찍었으며, 이번 한국 대통령선거에 대해서는, 불교신자인지 가톨릭신자인지, 이도 저도 아니면 부친을 닮아 니체의 철인정신을 추종하는 무신론자인지 도통 알 수 없는 박근혜 당선자를 선택한 한국 친척들에게 잘했다고 박수를 쳐주었습니다.

그러나, 미국 대통령선거에서 람니가 떨어져 전혀 아쉽지 않고, 한국에서 보수진영의 지지를 받은 박근혜 씨가 당선되었다고 하나도 기쁘지 않습니다!

문득, 20세기 미국 보수주의 운동의 주창자로 알려져 있는 윌리암 F. 버클리(William F. Buckley Jr: November 24, 1925 – February 27, 2008)가 떠오릅니다.


빌 버클리는, 자유시장정책과 자유무역 등 자본주의 정신을 철저하게 수호한 자타가 공인하는 자유주의 보수파(Libertarian Conservative) 계열에 속했지만, 동시에 헨리 죠지(Henry George: September 2, 1839 – October 29, 1897)의 토지공개념(土地公槪念: the Public Concept of Land Ownership)을 소극적이나마 지지했던 진정한 의미에서 개혁적 보수주의자였습니다.

미국이나 한국이나, 헌법의 보수적 가치를 경홀히 여기지 않으면서도 지공주의(地公主義)를 성경적으로 잘 소화하여 융통성 있게 작금의 현실에 적용하기 위해 도전하는 진정한 보수주의 운동이 가야할 길은 아직 멀어 보이기만 합니다.


Originally posted on Facebook: Wednesday, December 19th, 2012 at 5:21pm

12.09.2012

◈'홀로'와 '더불어': 삼위일체론적 영성에 대하여

존경하고 사랑하는 K. 목사님,

우선, 제 얼책(페이스북) 폐지 이유에 대해 약간의 오해가 있으신듯 합니다.


저는 목사님께서 얼책에 올리신 글과 전혀 상관없이 얼책 폐지를 결정했습니다. 저는 얼책을 통해 포장되는 "얼-꼴"(多夕 류영모 선생의 표현)의 가식적인 면과 감정적이고 자극적인 언어들이 난무하는 분위기가 그저 저와는 어울리는 분위기가 아니라고 결정했을 뿐입니다. (물론 제 성격 자체가 얼책과 맞지 않는다는 의미일 뿐이지만 말입니다.)

그렇지만, 일주일이 채 안되는 제 얼책활동 중에 유일하게 제 생각을 피력해 올렸던 그 짧은 글을 쓸 때, 저는, '고독의 영성'과 '개인주의'를 분명하게 구분하고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공동체의 영성'과 '집단주의' 역시 구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소 민감하고 복잡한 주제로 여겨지지만,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자면, 기독교 공동체가 추구해야 할 영성은 "삼위일체론적 영성"이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작금의 한국교회가 '삼위일체론적 영성'을 과연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오히려 이교적 '일신론'에 바탕을 둔 '집단이기주의'가 팽배할 뿐 아닌가 싶습니다.

제가 얼책에 쓴 '어두운 밤 홀로 걷기'에 대한 글은, 작금의 한국교회가 빠져있는 '개교회주의적 집단이기주의' 현상에 대한 모순적 비판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목사님께서, "우리 그리스도인은 홀로가 아니지 않나요?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안에 계시고 그 분이 우리와 동행하고 있다면 말입니다."라고 말씀하셨는데, 적극 동의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염려되는 점을 말씀드리자면, '신인합일론(神人合一論)'의 위험입니다. 물론, 목사님께서는 누구보다 '신인합일론'의 위험성을 잘 알고 계시리라 확신합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있다는 말씀, 하지만, "우리"가 성령은 아니지요. (혹, 칼빈이 클레르보의 성 버나드의 글을 대거 인용하여 주장한 "그리스도와의 연합" 개념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이라면, 제가 크게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문득, 제가 감히 목사님께 신학적 개념 운운하는 것이 참 버릇없는 행동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단지 '홀로'와 '더불어' 사이의 균형이 깨져버린 한국교회의 현실을 제 일상적 생활에 비추어 생각해 보았던 것입니다. 역설적이게도 개(個)교회적 차원에서 '함께'를 매우 강조하는 한국교회는, 범(汎)사회적 차원에서는 집단이기주의라는 추태를 보이고 있습니다.

'홀로'라는 말의 의미를 곧장 '외로움'으로 연결시키거나, '더불어'와 대립시키는 모습에서 한국교회의 집단주의적 성향이 나타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진정한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는 '홀로'와 '더불어'가 서로 대립되는 개념이 아니라, '삼위일체론적 영성'을 추구하는 건강한 공동체관(觀) 안에서 균형을 잡아야 하지 않을까요?!

마지막으로, 제가 보고 있는 관점을 제대로 전달하기 위해서 가톨릭 시인 구상 선생님의 시 두 편을 소개해 드립니다.


"그분이 홀로서 가듯"


홀로서 가야만 한다. 

저 2천 년 전 로마의 지배 아래 

사두가이와 바리사이들의 수모를 받으며 

그분이 홀로서 가듯 

나 또한 홀로서 가야만 한다.


악의 무성한 꽃밭 속에서 

진리가 귀찮고 슬프더라도* 

나 혼자의 무력(無力)에 지치고 

번번이 패배의 쓴잔을 마시더라도 

제자들의 배반과 도피 속에서 

백성들의 비웃음과 돌팔매를 맞으며 

그분이 십자가의 길을 홀로서 가듯 

나 또한 홀로서 가야만 한다.


정의는 마침내 이기고 영원한 것이요, 

달게 받는 고통은 값진 것이요, 

우리의 바람과 사랑이 헛되지 않음을 믿고서


아무런 영웅적 기색도 없이 

아니, 볼 꼴 없고 병신스런 모습을 하고* 

그분이 부활의 길을 홀로서 가듯 

나 또한 홀로서 가야만 한다.



"홀로와 더불어"


나는 홀로다. 

너와는 넘지 못할 담벽이 있고 

너와는 건너지 못할 강이 있고 

너와는 헤아릴 바 없는 거리가 있다.


나는 더불어다. 

나의 옷에 너희의 일손이 담겨 있고 

나의 먹이에 너희의 땀이 배어 있고 

나의 거처에 너희의 정성이 스며 있다.


이렇듯 나는 홀로서 

또한 더불어서 산다.


그래서 우리는 저마다의 삶에 

그 평형과 조화를 이뤄야 한다.


(구상문학 총서-제 2권: "오늘 속의 영원, 영원 속의 오늘," 구상 지음, 홍성사)

Originally posted on Facebook: Monday, December 10, 2012 at 3:31am

12.08.2012

◈아무도 없는 어두운 밤에 홀로 걷기.

아무도 없는 고요한 밤거리, 홀로 걷는 이 기분을 아시나요? 적막감(寂寞感)? 고독감(孤獨感))? 뭐 그런 분위기를 느끼는 것 같습니다. 헨리 데이빗 소로우는 이 기분을 알고 있었다지요. 저는 지금, 한국교회를 생각합니다. 공동체성을 강조하는 것, 물론 좋습니다. 그러나 과연 "홀로"를 연습하지 않고 "함께"만을 강조하는 게 공동체일까요? 그저 겨울밤 홀로 걷다 떠오른 몽상(夢想)일 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고요한 밤, 거룩한 밤 되시길~!


*사진: 공허한, 그러나 나의 하루 중에 "홀로" 그리고 "함께" 계시는 삼위일체 하나님과 가장 가까운 몬로시 메인 스트릿 야경(夜景) -Monroe, WA.

Originally posted on Facebook: Thursday, December 6, 2012 at 1:21am

11.05.2012

◈"기독교와 선거: 민주주의와 정의"


손봉호 고신대 석좌교수


선거철이 다가왔다. 예년에 비해서 금년 선거는 좀 더 시끄럽다. 각 정당이 대대적인 물갈이를 하겠다고 나서기 때문인 것 같다. 그리고 기독교계에서도 예년에 비해서 선거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고 있다. 장로인 이명박 대통령의 치적에 대해서 부정적인 평가가 많기 때문에 기독교계가 정치문제에 좀 더 민감해진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그런 관심이 잘못되면 오히려 역작용이 일어날 수 있으므로 한국 기독교인들은 정치문제에 대해서 이제는 좀 더 성숙한 이해와 판단으로 입장을 잘 정리해야 할 것이다. 우선 우리는 기독교적 관점에서 정치, 민주주의, 선거를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 손봉호 교수 (고신대학교 석좌교수/ 양화진 문화원 홈페이지에서 캡쳐)

1. 기독교와 정치

여러 신학조류들 가운데 정치문제에 대해서 가장 적극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이 개혁주의라 할 수 있다. 개혁주의가 가장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이고, 그리스도인들은 정치 영역을 포함한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주권과 영광을 드러내야 하기 때문이다. 신칼빈주의자로 알려진 아브라함 카이퍼는 “오!. 우리의 정신세계 어떤 부분도 다른 부분과 완전히 단절되어 있지 않다. 모든 것에 절대주권을 행사하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인간존재 영역에서 ‘내 것이다!’ 할 수 없는 부분은 한 치도 없다!”고 주장했다. 정치는 인간 활동의 아주 중요한 부분이므로 하나님의 절대주권에서 한 치도 벗어날 수 없다.

오늘날 국가는 과거 어느 때보다 더 강력해졌고 우리의 삶에 결정적인 영향을 행사한다. 우선 국가만 처벌할 권리를 가진다. 과거에는 교회, 학교, 가정이 벌을 줄 수 있었으나 오늘날은 국가 이외에는 아무도 벌을 줄 수 없다. 그리고 전쟁이 일어나면 국가만이 우리의 아들, 딸들에게 목숨을 내놓고 싸우라고 요구할 권한이 있다. 과거에는 교회, 부족 등이 돈을 거둘 수 있었으나, 오늘날은 오직 국가만이 강제로 세금을 거둘 수 있다. 돈의 힘이 과거 어느 때보다 더 커진 현대사회에서 세금을 거둘 수 있는 권한은 매우 큰 힘이다. 과거에는 가난한 사람을 친척, 이웃, 교회들이 돌보았으나 이제는 국가가 국민들의 복지를 책임지게 되었다. 그 외에도 국가는 학문, 예술, 스포츠, 심지어 유희 문제에조차도 직접 혹은 간접으로 간섭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모든 문제를 관리하고 책임지기 위해서는 국가가 막강한 권한을 가질 수밖에 없다. 철학자 호브스 (Thoams Hobbes)가 지적한대로 국가는 이제 르와단 (Leviathan)과 같이 무서운 괴물이 되고 말았다.

이렇게 중요하고 강해진 국가가 어떻게 그 권한을 행사할 것인가를 결정하고 관리하는 것이 정치다. 우리 자신과 자녀, 이웃의 생존과 활동에 이렇게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정치에 우주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섬기는 그리스도인들이 무관심하면 이는 중요한 책임회피가 아닐 수 없다.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서 한 편으로 나그네이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청지기이기 때문이다.


2. 민주주의와 정의
인류가 이제까지 개발한 정치제도 가운데 가장 우수한 것이 민주주의란 것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많지 않다. 모든 사람이 법 앞에서 동등한 권리를 향유하며, 그 법 자체를  만드는데도 모든 사람이 동등한 권리를 가지고 참여하는 것을 보장하는 제도이기 때문이다.  다른 어떤 제도도 개인의 성, 신분, 재산, 교육, 능력 등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이 이렇게 동등한 권리를 행사하고 동등한 대우를 받도록 보장하지 못한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기본인권을 가지고 있고 존엄하며 평등하다는 생각은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는 사실에 근거해 있다. 왜 인간은 기본인권을 향유할 수 있고 인간은 왜 존엄한가를 뒷받침 할 수 있는 이론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는 가르침 외에 아직 제시된 것이 없다. 이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 고통을 느낄 수 있기 때문 등의 이론이 제시되었으나 충분한 설득력이 없다. 민주주의가 기독교 문화에서 시작되고 발전했다는 사실은 우연하지 않다.

모든 사람이 동등한 권리를 행사하고 동등한 권리를 인정받는다는 말을 좀 더 현실적으로 표현하면 가난하고, 힘없고, 무식하고, 무능한 사람도 다른 사람 못지않게 기본권을 행사할 수 있고 존엄한 인간으로 취급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성경이 가르치는 정의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동일하게 사랑하시지만 특히 약한 자들에게 좀 더 관심을 쓰고 그들의 권리를 보호하신다. 고아, 과부, 객 (외국인)을 특별히 돌보시고 그들의 권리를 무시하는 관원들에게 진노하신다. 예수님도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기 이하여 오셨지만 특히 병든 자와 장애인을 고치시고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바로 그가 메시야임을 증명하는 것으로 말씀하셨다 (마11:1-5).

흔히 민주주의는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에서 시민들이 모여서 중요한 사항들을 결정한 것에서 시작되었다 한다. 그러나 그 결정에는 자유시민들만 참여했을 뿐, 여자, 노예, 상인들은 제외되었다. 즉 사회의 강자들만 권한을 행사했을 뿐 약자들의 권리는 전적으로 무시되었다. 그러므로 민주주의적 결정의 형식은 갖추었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민주적이었다 할 수 없다. 사회에서 가장 약한 사람들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 제도는 진정한 의미의 민주주의라 할 수 없다. 진정한 민주주의는 가장 약한 사람들도 가장 강한 사람과 동등한 권리를 향유할 수 있어야 하고, 그렇게 할 있는 근거는 성경의 가르침이 제공하고 있다.

3. 민주주의와 부패
그러나 성경은 어디서도 민주주의를 가르치지 않고, 성경에 소개되는 정치제도는 대부분 전제군주제다. 그런데 민주주의 제도를 제외한 다른 제도들은 사회 약자들의 권리를 충분히 보호하지 않는다. 물론 이론적으로는 군주나 독재자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국민을 진심으로 사랑하면 얼마든지 그들의 권리를 보호해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상 그런 군주나 독재자는 거의 없었다 할 수 있다. “모든 권력은 부패할 경향을 가지고 있고, 절대적인 권력은 절대적으로 부패한다”는 액튼(J. Dalberg-Acton)의 말처럼 권력을 독점하면 반드시 부패하고, 부패는 정의를 파괴하기 때문에 약자가 항상 그 피해자가 된다.

인간의 전적부패를 누구보다 심각하게 취급한 신학자는 칼빈이었다. 그런데 그는 모든 기독교 신학자들 가운데 가장 먼저 그리고 분명하게 민주주의를 선호했다. 신명기 17:14-18을 본문으로 한 설교에서 칼빈은 “하나님이 자신의 권위로 왕을 세우지 않고 사람들의 선호에 따라 세우도록 하셨다. 만약 그가 왕권통치를 허락하시거나 (그런 통치를) 그가 선호하시는 것이었더라면 왕이 명령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백성들이 순종하도록 제정하시지 않았겠는가?” “선택 혹은 선거에 의하여 뽑힌 통치자들을 갖는 것이 군주 (a Prince)를 갖는 것보다 훨씬 더 용인될 수 있다. 그래서 그는 그의 임무를 수행함에 있어 그가 법률의 지배를 받아야 함을 알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민주주의가 그 자체로 좋아서가 아니라 가장 다른 제도보다 인간의 악을 더 잘 막을 수 있기 때문에 선호될 수 있다는 것이다. “군주가 주권을 가지게 되면 그들 자신의  기분과 선호에 따라 판관들을 임명하고 야심이 모든 것을 지배하게 된다. ...아니, 그 보다  더 심각하고 부끄러운 부패가 있다. 최근에는 공직이 다른 상품들처럼 팔리고 있다. 우리가 그런 에를 목격하면 하나님께서 한 민족이나 국가로 하여금 그들 자신의 판관이나 지배자를 선택하도록 허락하신 것은 감히 계산할 수 없을 만큼 고귀한 선물이란 것을 알 필요가 있다.”

물론 민주주의에도 약점이 많다. 특히 다수의 결정은 소수의 전문가의 결정보다 대부분 못하다. 미국 같이 민주주의 선진국에서도 부쉬같은 사람이 대통령으로 당선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민주주의는 원칙적으로 뿐만 아니라 현실적으로도 매우 우수한 제도다. 권력의 독점을 막고 권력을 분산시켜 서로 견제하게 함으로 부패를 막을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3권분립, 주기적인 선거, 정권교체 등은 모두 부패를 막는데 필수적이다. 모든 민주국가가 다 부패로부터 자유로운 것은 아니지만 민주주의를 제외하고는 부패를 막는 방법은 없다.

권력이 부패하고 사회질서가 무너지면 반드시 약자들이 가장 먼저 그리고 크게 고통을 당한다. 강자는 손해를 보지 않을 뿐 아니라 손해를 봐도 치명상을 입지 않는다. 그러나 부패한 사회에서는 약자가 안전과 생존의 위협을 받는다. 법과 질서는 모든 사람에게 필요하지만 특히 약자들이게 필요하다. 민주주의가 부패를 막고 약자를 보호하는 최선의 제도라면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보다 더 민주주의를 건전하게 발전시키는데 공헌해야 할 것이다.



4. 기독교인과 선거
선거는 민주주의의 시작이고 핵이다. 선거가 자유롭고 공명하게 치러지면 다른 조건들이 충족되지 않더라도 민주주의는 실현될 수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보다 더 선거가 자유롭고 공명하게 이뤄지는데 공헌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어떤 방법으로든 선거부정은 막아야 한다. 오늘 한국 선거가 이만큼이라도 공명하게 된 것은 수많은 그리스도인들과 시민운동가들이 그들의 시간, 돈, 정력을 바쳤기 때문이다. 4.19 혁명 때 수많은 젊은이들이 공명선거를 위하여 목숨을 바쳤고 이미 1987년에  <공명선거기독교대책위원회>을 만들어 시민운동를 벌렸다. 1982년에 조직되어 선거법 개정에 크게 공헌한 <공명선거시민운동협의회> (공선협)도 기독교인들이 시작했다. 한국 교회는 그 유산을 잘 살려서 선거부정을 저지르지 않을 뿐 아니라 저지르는 후보에게 투표하지 않으며 고발하는 것이 의리를 지키는 것이다.

물론 기독교인들은 반드시 투표해야 한다. 그것은 시민의 의무일 뿐 아니라 돈, 연고 등 올바르지 못한 이유로 투표하는 사람들의 상대적 가치를 약화시키는 효과도 가져온다.

5. 기독교 정당과 기독교인 후보
기독교 정당이란 이름을 내 건 정치단체가 생겨나고 기독교인 후보자가 출마해서 기독교인들의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그런 정당, 그런 후보를 그리스도인들이 지지해야 하는가?

물론 기독교 정당이 정말 정직하고 공정하며 매우 유능해서 다른 정당들보다 훨씬 더 정의롭고 유능하게 정치할 수 있으면 당연히 지지해 주어야 할 것이다. 그것은 기독교인 후보자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들이 기도를 잘 하고 예배에 잘 참석하고 교회 봉사도 잘 하지만 정직하지 못하고 공정하지 못하며 무능하면 그들이 권력을 잡는 것이 나라와 국민 뿐 아니라 한국 교회와 하나님 나라에 큰 해를 끼친다. 이름만 기독교인이고 무늬만 기독교 정당이지 비기독교인보다 더 부정직하고 불공정하며 무능하면 그 분 혹은 그 정당 때문에 한국 교회와 기독교가 같이 욕과 비난을 다 받게 될 것이다. 훌륭한 정치인은 입으로만 떠드는 사람이 아니라 진실로 시민과 정의를 위하여 노력하며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다. 만약 불신자가 진실하고 책임 있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은 그런 불신자를 통해서도 얼마든지 그의 뜻을 이룩하실 수 있다.

우리 정치가들의 약점은 훌륭한 정책이 없어서가 아니라 정직하고 공정하지 못한 것이다. 아무리 좋은 정책을 내 세워도 그것을 올바로 실천에 옮길 정열도, 능력도 없으면 그는 무책임하고 무능한 정치인이다. 우리나라 정치에는 거짓과 불공정이 난무하고 그 때문에 온 국민이 고통을 당하고 있기 때문에 반드시 정직하고 공정한 후보자를 국회에 보내야 하고, 그리스도인들이 이에 앞장서야 하는 것이다.

2012년 03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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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강의) 양화진 목요강좌: 손봉호 고신대 석좌교수 "민주주의와 정의" (11/01/2012)

기사 출처:  http://www.kscoramdeo.com/news/read.php?idxno=5107

사진 출처: http://www.yanghwajin.re.kr

7.07.2012

◈"나봇의 비극"

한송이 이름 없는 들꽃으로이현주 지음, 1984, 298~300쪽  

그 후에 이 일이 있으니라 이스르엘 사람 나봇에게 이스르엘에 포도원이 있어 사마리아의 왕 아합의 왕궁에서 가깝더니...그 아들의 시대에야 그의 집에 재앙을 내리리라 하셨더라(열왕기상 21장 전체). 선지자 엘리사가 선지자의 제자 중 하나를 불러 이르되 너는...이르시기를 이스르엘 토지에서 개들이 이세벨의 살을 먹을지라. 그 시체가 이스르엘 토지에서 거름같이 밭에 있으리니 이것이 이세벨이라고 가리켜 말하지 못하게 되리라 하셨느니라 하였더라(열왕기하 9장 전체). 

땅은 말이 없다. 땅은 그냥 여기에 있다. 사람들도 이 땅에서 그냥 살아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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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가끔 땅을 자기의 것으로 소유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인간들이 있어서, 비극은 비극을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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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중해 연안, 갈릴래아와 사마리아 사이에 있는 들판, 사람들이 부르기를 이즈르엘 평지라 한다. 나는 그곳에서 꽤 여러 십 년 동안 "나봇의 포도밭"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졌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임시로 불리는 별칭과 같은 것이었고 나는 그때나 이제나 변함없는 땅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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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한테 신세를 지면서 그야말로 "몸붙여" 사는 인간들이 멋대로 이름을 붙였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나는 한번도 그들의 손아귀 속에 들어가 본 적이 없다. 아무도 나를 나로부터 빼앗아가지 못했다. 물론 세월따라 갈아 입는 옷처럼 여러 이름을 지닌 사람들이 이동하고 죽어 가고 다시 태어남에 따라, 나는 포도밭이 되기도 하고 전쟁 마당이 되기도 하고 수풀이 되기도 하고 국경선이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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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봇이라는 고집센 사람이 내 품에서 포도나무를 가꾸고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나를 "나봇의 포도밭"이라고 불렀다. 그런 적이 있었다는 말이다. 이제는 다 까마득한 옛 이야기가 되고 말았지만 그러나 그 시절에 있었던 피비린내나는 비극은 잊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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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왕은 아합이었다. 별로 강하지도 못하면서 강한 척하는 못난 사내였다. 그런데 그가 장가를 잘못 들었다. 잘 들었다는 사람도 있긴 있었다. 요부 이세벨. 요염한 자태와 나긋나긋한 음성, 부드러운 미소 뒤에 녹슬지 않은 칼을 뱀의 혓바닥처럼 숨긴 여인이었다. 아합 같은 못난 사내가 그나마 왕위에 앉아 20여 년 버틴 것은 전적으로 그의 아내인 이세벨의 독기(毒氣) 덕분이었다는 말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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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아합은 별궁에 왔다가 나를 보았다. 포도나무를 없애고 정원으로 가꾸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나봇을 불러 나를 자기에게 팔라 했다. 제것도 아니면서 사고팔고 하는 것 자체도 우습지만, 죽어도 팔 수 없다고 고집세우는 나봇 또한 나로서는 잘 납득이 가지 않는 인물이었다. 하긴 인간이란 존재 자체가 나한테는 괴상한 수수께끼일 뿐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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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합은 낙심하여 돌아갔고 일은 그것으로 끝나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죽어도 팔수 없는 땅이라면 죽여서라도 빼앗아야겠다는 이세벨의 표독스런 손길이 뻗쳤고, 결국 무력한 재판장(즉 허수아비 재판장)과 도무지 뭘 모르는 무뢰배 건달들과 역시 허수아비에 불과한 이른바 유지들이 손을 잡고 나봇에게 돌을 던져 그를 돌무덤 속에 묻어 버리고 말았다. 나는 아합의 별궁 정원이 되었다. 아합은 일의 자초지종을 알고 나서 얼굴을 들지 못하고 옷을 찢으며 단식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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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것으로 이미 시작된 비극을 막을 수는 없었다. 나봇의 피로 물든 나의 더운 가슴은 또 다른 피로 젖지 않으면 안 되었다. 아합은 전쟁 마당에서 피를 뿜으며 죽어 갔고 그의 아들 또한 반역자의 화살에 가슴이 뚫려, 나봇의 피가 괴어 있던 바로 그 자리에 걸레처럼 내던져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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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부 이세벨, 그는 과연 지독한 여자였다. 죽던 날에도 죽음을 기다리며 눈화장에 머리손질 단정히 하고는 남편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던 아들을 죽이고 쳐들어오는 반역자를 욕설로 맞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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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전을 죽인 역적 지므리놈아! 그래 일이 잘 되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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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미 그것은 발악일 뿐, 이세벨은 조금 전까지 시중을 들어 주던 내시들의 손에 붙잡혀 높은 창문 밖으로 내던져졌고, 그 작은 몸뚱이에서 튕겨나온 핏방울이 담벽과 군마에 묻었다. 말이 그를 짓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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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려진 시체는 배고픈 들개들의 밥이 되었다. 탐욕스런 이빨이 자기의 부드러운 살점을 뜯어가는데도, 이세벨은 아무런 표정이 없이 곱게 뜬 눈으로 푸른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구역질이 났다. 도대체 내가 왜 이 피비린내를 맡아야 하는가? 내가 어째서 이 역겨운 피로 가슴을 적셔야만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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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끝없는 탐욕이 부르는 걷잡을 수 없는 비극의 악순환을 과연 무엇으로 단(斷 !) 할 수 있을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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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봇의 비극은 그 뒤에도 되풀이되었고 지금도 내 가슴 위에서 진행되고 있다. 신이여, 나를 이 질곡에서 구원해 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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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출처:한송이 이름 없는 들꽃으로이현주 지음, 1984, 298~300쪽


이현주(1944년~). 감리교 목사이다. 동화작가이며 번역문학가이기도 하다.1944년 충주에서 출생하여 감리교신학대학교에 진학하였다. 신학교 재학시 변선환 박사에게 배웠으며, 졸업후 죽변교회 등에서 목회했다. 1977년 《공동번역성서》번역에 참여했으며,저서로는 예수의 수난과 죽음을 시적으로 표현함으로써 기독교 평화주의를 주장한《예수의 죽음》(샨티)등이 있다. 진보적인 신학잡지《기독교 사상》에 공동번역성서를 성서번역본으로 한 성서 묵상을 연재할만큼 작가로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으며,《풍경소리》라는 기독교 잡지를 발행하고 있다. 1970년대 민주화 운동의 정신적 스승이자 '한살림'의 지도자이었던 장일순 선생의 제자이기도 하다.(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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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이들이 이 시대의 멘토로, 영성가로 꼽는다. 글이 모이면 책을 내고, 부르는 곳이 있으면 찾아가 이야기를 나누며 살고 있다. 그동안 《기독교인이 읽는 금강경》 《지금도 쓸쓸하냐》 《예수의 죽음》 《길에서 주운 생각들》 《장자 산책》 《대학 중용 읽기》 등을 썼으며, 《무위당 장일순의 노자 이야기》가 세상에 나오는 데 산파역을 했다. 《숨겨진 보물을 찾아서》 《예언자들》 《바가바드기타》 등 수많은 책을 우리말로 옮겼으며, 《바보 온달》 《콩알 하나에 무엇이 들었을까?》 등의 동화를 쓰기도 했다.(알라딘)

5.31.2012

◈"누가 나봇을 죽게 했는가?"

《미주 뉴스앤조이》고 노무현 대통령 서거 3주기에 읽는 나봇의 포도원 이야기

김범수(시애틀 드림교회)   2012년 05월 20일 (일) 13:59:42


많은 교회가 교회 기념일뿐 아니라 국가의 정치적 기념일을 기념하고 교회에서 기념 주일로 지킨다. 미국의 독립기념일이나 한국의 삼일절, 광복절 기념 예배가 그렇다. 기독인에게 신앙과 삶이 분리되지 않으므로 특정한 날이 되면 하나님이 역사 속에서 움직이신 일을 기억하고 성경의 가르침을 기억하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그러나 90년 전의 삼일절이나 60년 전의 광복절은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나고 하나님의 뜻에 감격하는 의미가 살아 있는 간증이 되었지만, 요즘 우리나 자녀에게 별다른 의미를 주지 못한다. 오히려 더욱 가까운 시점에 일어난 역사적 사건을 기념하고 거기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2009년 5월 23일 노무현 대통령이 죽은 지 3년을 바라보는 오늘 2012년 5월 세 번째 주일은 노무현 대통령 삶과 죽음의 의미를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려 한다. 정치적인 견해를 가지고 한 사람을 추모하려는 것이 아니고 성경에서 이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경고하는 메시지를 들으려는 것이다.

이 사람을 보라 - 그는 섬기는 지도자였다

불신자에게 구원은 없다고 성경은 분명히 가리키지만, 불신자도 성경 가르침을 실행할 수는 있고, 심지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로 사용하시기도 한다. 그는 지도자가 되어 국민의 눈높이에서 대화하고 섬기려는 지도자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노무현 대통령도 사람이라서 실수도 있었을 것이지만 대체로 한국 사회에 과분하게 정직하고, 겸손했으며 민주주의의 원칙을 지키려 노력했다. 자신이 아닌 국민의 유익을 위해서 열심히 일한 보기 드문 대통령이었다. 역대 대통령 가운데 가장 정통성 있는 민주 정부를 세웠고 역대 대통령 가운데 임기 동안 친인척 비리가 가장 적었다. 이것은 그동안 어느 기독교 정치가도 보여 주지 못한 참신한 자세였고 예수님이 가르치신 섬기는 지도자의 표본이 될 수 있다. 정치가가 되고 특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기독교 정치가가 되려면 예수님처럼 섬기는 종이 되어 섬기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불신자였던 노무현 대통령이 보여 준 민주적인 자세만큼이라도 따라가도록 노력해야 한다.

천주교에서 영세를 받은 적이 있다는 그의 신앙관은 불분명하고 기독교 신자는 분명히 아니었다. 그러나 성경이 믿는 사람만 기억하는 것은 아니다. 고레스 왕은 이방 바벨론 왕이었지만 포로 된 이스라엘의 귀향 명령을 내렸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를 이스라엘을 회복시키는 도구로 사용하셨다고 성경은 칭송한다. 성경은 그가 구원을 받고 천국에 갔는지는 언급하지 않는다. 구원은 행위가 아니라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얻기 때문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영혼도 구원은 받지 못했지 모른다. 설령 구원을 받지 못했어도, 앞으로 오는 세대에 좋은 모범을 보여 준 하나님의 도구가 되었다는 것으로 그의 삶은 의미가 있다.

이 사람을 보라 - 그는 선한 농부 나봇이었다

구약의 엘리야 선지자가 갈멜 산에서 바알 제사장 850명과 싸워서 이긴 일은 유명하다(왕상 18). 그때 그 많은 바알 제사장이 활개 치도록 놔둔 왕이 역사상 가장 악한 왕으로 평가받은 아합 왕이고 그의 아내 이세벨 왕비다. 가뭄이 든 이유도 왕 때문이다. 왕의 악행을 보고 이스라엘 전역에 3년의 가뭄이 들었다(왕상 17). 엘리야는 까마귀가 물어온 음식을 먹었고, 후에 그를 섬긴 사렙다 과부의 집에 밀가루와 기름이 끊이지 않았고 아들도 죽었다 살아나는 이야기가 가뭄 동안 일어났다. 바알 제사장을 이기고 다시 비를 내리게 한 엘리야는 유명하지만 그를 핍박했던 왕에게는 주의를 잘 돌리지 않는다. 이런 놀라운 엘리야의 기적을 보고도 회개하지 않고 도리어 끈질기게 핍박해서 엘리야마저 차라리 죽고 싶다고 울게 만든 강퍅한 자가 있었다. 엘리야 대 선지자를 우울증에 걸리게 하고 40주야간 사막에서 울부짖게 만든 이가 바로 아합과 이세벨이다(왕상19).

이 악한 왕은 정치적 종교적으로 하나님 보시기에 악했을 뿐 아니라 자기 소유 즉 부동산에 대한 욕심도 대단했다. 그가 돌이키기는커녕 궁전 옆 나봇의 포도원을 자기 정원으로 삼고 싶은 욕심이 생겨서 고민한다. 돈을 주고 땅을 사겠다고 해도 믿음이 좋은 농부 나봇은 하나님이 정해 준 땅을 파는 것은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는 것이라며 왕의 제안을 거부한다. 최소한의 양심이 남아있던 왕은 구구절절 옳은 소리를 하는 나봇을 어떻게 할 수는 없지만, 속으로는 끓어오르는 탐심을 억제하지 못하고 끙끙 않는다(왕상21). 힘들어하는 그를 본 이세벨이 남편을 위해 모종의 수를 써서 땅을 빼앗아 남편에게 선물한다. 부창부수, 악행에 다정한 부부다. 사람들 앞에 그를 세우고 하나님과 왕을 모독했다는 누명을 씌워 그를 돌로 쳐 죽인다. 후에 예수님이 성전을 모독했다는 증인의 말에 판결을 받고 무고히 십자가에 달리시는 것을 연상시킨다. 이 악행을 보고 엘리야가 다시 와서 악한 부부는 비참이 죽게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 얼마 뒤 그 예언이 응해서 아합과 이세벨 부부는 비참히 죽고, 곧 엘리야는 사역이 끝난다. 대선지자 엘리야의 사역은 이렇게 악한 아합 부부와 같이 펼쳐진다.

나는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에서 나봇을 보았다. 그의 뒤를 기독교인 대통령이 이었는데, 후임 대통령과 그를 추종하는 세력의 핍박으로 죽음에 몰리게 된다. 사람들은 자살하는 것이 옳으냐에 관심을 갖는데 이는 부수적인 문제다. 오히려 믿음을 가진 대통령이 악을 행해서 무고한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것이 더 큰 문제다. 과연 신자가 악을 행할 수 있는가? 어떤 기독교인들은 인정하기 싫어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자가 악을 행하는 것은 세계 역사는 물론 성경 역사를 통해서도 수도 없이 입증되어 왔다. 나봇의 포도원을 탐내서 나봇을 죽이고 자기 정원으로 만들어 버린 아합과 이세벨 왕의 악행이 그렇다. 나는 무고히 죽은 노무현의 모습에서 "하나님이 정해 주신 땅은 팔지 말라고 하셨기 때문에 왕이 원한다 해도 율법을 지켜 땅을 팔지 않겠다"고 저항했던 원칙주의자 농부 나봇을 보았다.

이 사람을 보라 - 기독교인 이명박 대통령이 아합 왕이다

또 나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불법과 악행을 마다하지 않았던 악한 왕 아합과 그의 부인 사악한 이세벨의 모습에서 소위 교회 다닌다는 이명박 대통령의 모습을 본다. 아합과 이세벨은 결국 비참히 죽고 그들의 피는 개들이 핥는다. 성경의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다. 그래서 아무리 큰 죄인이라도 진실로 회개하면 구원하시는 은혜를 베푸신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을 감찰하신다. 교회에 다닌다고 하면서도 회개하지 않고 끊임없이 악을 도모하는 악인들은 이것을 명심해야 한다. 열매를 보면 나무를 안다. 교묘하게 사람을 속일 수는 있어도 하나님의 눈까지 속일 수는 없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정의로우시다. 무고한 사람을 죽인 악인은 그 피값을 갚아야 할 것이다. 설사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은혜 아래 숨는다 해도 하나님의 공의의 문제가 저절로 해결되지는 않는다. 믿음이 없이 교회에 이름만 걸쳐 놓은 악인의 경우는 하나님이 그의 중심을 정확히 보시고 적절하게 심판하실 것이다. 만약 그가 악을 행하면서도 아주 신실한 기독교인이면 어떻게 되는가? 있을 수 없는 가정이다. 소금이 맛을 잃으면 소금이 아니고, 빛을 잃으면 더는 빛이 아닌 거다. 모순되는 상황이지만 어떤 죄도 용서하시는 은혜의 하나님은 동시에 어떤 죄도 빠뜨리지 않고 정의롭게 심판하실 공의의 하나님이다.

이것이 서로 모순되는 것 같고 어려운 문제가 되는가? 먼저 생각할 것은 이런 어려운 문제를 던진 것은 바로 인간들이다. 원래 상식대로 예수 잘 믿고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 어두운 세상의 존경을 받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었다면 아무 문제가 없다. 그러나 우리가 그러지 못하고 세상보다 더 악한 모습을 보이니까 우리도 하나님의 구원에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게 된다. 세상 사람들도 저런 사람까지도 단지 예수 믿는다는 이유만으로 천국에 간다고 한다면 나는 차라리 기독교인이 말하는 그 천국에 가지 않겠다고 화를 내는 것이다. 하나님이 아니라 예수를 믿으면서도 행동이 변하지 않고, 세상의 손가락질을 받는 우리 기독교인들이 문제를 만들었다. 이명박 대통령이 교회를 다니면서도 지속적으로 악을 행했기 때문에 이런 딜레마가 생기는 것이다. 착한 하나님이 아니라 악인이 이런 혼란을 만든 것이다.

과연 그와 그의 형과 비리로 점철되고 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든 부정선거를 자행하는 그의 기독교인 친구들을 우리도 천국에서 만나야 할까? 같은 기독교인이지만 나도 싫다. 아무리 경고해도 4년 내내 조금도 회개의 기미를 보이지 않고 죄를 쌓아서 하나님과 교회를 부끄럽게 한 그들을 나도 거기서까지 만나고 싶지 않다. 확실히 이 문제는 하나님이 바르게 해결하실 것이라 믿는다. 어떻게 해결하실지 자세히는 모르겠다. 무한한 사랑과 용서, 그리고 엄정한 공의가 어떻게 조화를 이루게 하실지 문제다. 그러나 우리에겐 어려운 문제이지만 하나님은 능히 은혜로우면서도 지극히 정의로운 방법으로 심판하실 줄 나는 믿는다.

노무현 대통령 서거 3주년이 되었다. 우리를 위해 하나님이 선인과 악인을 보여 주셨다. 한국 역사 속에서 이처럼 선과 악이 분명하게 대비되는 경우도 많지 않다. 기독교인들에게는 바로 그 악인이 강남의 대표적인 교회에서 선출된 장로여서 더 안타깝다. 그만큼 하나님의 메시지가 시급하고 분명하게 드러났다. "한국교회여, 기독교 신자들이여.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약 2장). 이제라도 돌이켜서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라. 내가 지켜보겠다."

이것이 노무현 대통령 서거 3주년을 맞는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시급하게 경고하시고 권면하시는 주님의 사랑의 말씀이다.


김범수 목사 / 시애틀 드림교회

기사출처: http://www.newsnjoy.us/news/articleView.html?idxno=28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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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범수 Bomsu Kim

 Seattle, WA, USA.
교회를 심는 교회, 제자삼는 제자들의 공동체인 시애틀 드림교회 목사입니다. 건국대와 총신대원 미국 캘빈신학교에서 공부했습니다. 시애틀에 살며 [도서출판 권서인]을 통해 책으로 진 빚을 갚고 있습니다. '교회가 다르면 목회가 다르다' 등 [권서인]에서 계속 발행될 책들을 주목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