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6.2011

◈"하나님의 흔드심: 바르트의 성화론"

故 이정석 교수(1950~2011,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칼 바르트를 가리켜 ‘말씀의 신학자’라고 한다. 왜냐하면 그가 누구보다도 성경 말씀을 사랑하고 말씀에 능통하였을뿐 아니라 항상 말씀 앞에서는 자기를 낮추고 자기 논리와 자기 신학을 끝없이 수정한 신학자였기 때문이다. 그가 독일 대학에서 자유주의 신학을 배우고 신학을 우상시하였으나, 제네바와 사펠빌에서 목회를 하면서 신학을 설교한다는 것이 얼마나 잘못이며 교인들에게 성령의 감동을 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로부터 그는 변하기 시작하였고 놀라운 말씀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그가 배운 신학을 철저히 부정하고 순수하게 말씀만을 주해한 그의 로마서 주석은 독일과 유럽 신학자들에게 폭탄과 같은 위력으로 충격을 주었고 결국 말씀을 떠난 신학을 몰락시키고 말씀의 시대를 활짝 열었다. 
 
또한, 바르트의 신학을 가리켜 ‘변증법적 신학’이라고 부른다. 본래 변증법이란 헤겔이 주장한 정반합의 논리인데, 바르트의 변증법은 정과 반만 있고 합은 없는 것이다. 바르트는 성경을 깊이 연구하면서 성경은 결코 단순논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책임을 발견하였다. 왜냐하면 성경에는 긍정과 부정, 모순과 역설, 다양한 측면들을 모두 포함하고 있어서 획일적이고 단순한 논리로 보면 이해할 수 없는 말씀들이 많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성경의 일부 논리만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신학화함으로써 그것과 다른 성경구절을 의존하여 신학을 개발한 신학자들과 충돌하고 논쟁하고 분열하게 된다. 바르트는 그와 같은 신학 방법은 잘못되었다고 확신하고 성경의 일부가 아니라 모두를 수용할 수 있는 변증법적 논리를 채택하였다. 그것은 서로 모순되는 것같은 것도 함께 수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에게서 하나의 진리가 인간에게 오면 둘 혹은 그 이상이 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성경 말씀은 우리의 단순한 논리에서 보면 모순되고 충돌되기도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모순이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 인간의 존재와 인식이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신이라는 구절이 있는가 하면 인간이라는 구절도 있고,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인간이 저술한 책이기도 하다. 그러나, 바르트가 매우 반대한 것은 헤겔처럼 정과 반을 합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신이라는 것도 인간이라는 것도 혼합되지 말고 유지되어야 하며 결코 합하여 반신반인을 만들면 안 된다. 그래서 그는 합을 시도할 때 자유주의가 된다고 경고하였다. 성경 말씀은 영원히 있는 그대로 유지되어야 한다.

이와 같이 바르트는 전통적 신학 방법론에 일대 혁명을 시도하였고, 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단순논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신학자들은 바르트를 비판하기도 하지만, 성경이 신학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신학이 성경을 위해 존재한다면, 성경의 모든 논리를 수용하는 신학만이 옳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바르트의 신학은 단순논리가 아니라서 그리 일목요연하지 않으며 논리적 일관성도 부족하다. 오히려 그는 성경 진리의 풍요성을 있는 그대로 살려내려고 하였기 때문에 매우 다양하다. 더욱이, 그는 파란만장한 신학의 폭풍기에 활동하였기 때문에 성경 진리의 다양한 측면들이 거론되어 있다.

본서는 그런 바르트가 성화에 대해 논의한 그의 저술을 분석하여 소개한 책이다. 성화(聖化)란 거룩하게 만든다 혹은 거룩하게 된다는 뜻으로, 우리 그리스도인의 구원이 어떻게 자라나고 성숙해지고 완성되는가를 다루는 교리이다. 중생이나 칭의는 구원의 순간에 이루어져서 우리에게는 과거의 일인 반면, 성화는 우리가 일생동안 이루어나가는 구원의 과정이다. 따라서, 성화는 우리에게 있어서 중요한 과제이면서 성령께서 우리 안에 이루어나가시는 구원의 실체를 감사하고 고백하는 은혜의 현장이다. 현대의 대표적인 신학자 바르트가 그의 일생에 걸쳐 삶으로 고백하는 성화론은 오늘날 세속화가 심각한 현대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의 성화에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내가 이 글을 처음 쓴 것은 15년전의 일이다. 네델란드 자유대학교에서 박사학위 논문으로 쓴 것인데 이제야 한글로 번역하여 한국교계에 소개하게 되었다. 이 책은 바르트의 성화론이면서 동시에 바르트 입문서이기도 하다. 바르트 신학의 역사를 소개하고 바르트 신학의 전체적 조망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바르트 신학에 대해 오해가 편만한 한국에 본서가 바르트의 진실을 보여주는데 기여하기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그는 비판만 하고 무시하기에는 너무 위대하고 유용한 신학자이다. 그의 신학방법론만 올바로 이해하면 그의 진심과 겸손을 이해하고 그의 신학이 제공하는 풍요함과 다양성을 배움으로써 한국교회에 크게 기여할 수 있다. 신학도뿐 아니라 현장 목회자들과 평신도들도 본서를 읽어보기 바란다. 그래서 본문은 최대한 외국어를 사용하지 않고 많은 인용부호들을 제거하여 독서의 흐름에 도움이 되도록 하였다. 그리고 주석은 각주로 처리하여 학문적인 독자가 사용하도록 하였다. 원문은 J.S.Rhee, Secularization and Sanctification: A Study of Karl Barth’s Doctrine of Sanctification and Its Contextual Application to the Korean Church (Amsterdam: Free University Press, 1995) 제2장과 3장이며, 나의 웹사이트 http://www.jsrhee.com/
에서 볼 수 있다.

본서를 출판하면서 나의 지도교수였던 아드리아누스 반 에그몬트 교수님에게 다시한번 머리숙여 감사드리며, 기꺼이 출판을 담당해준 새물결 플러스 출판사와 김요한 목사에게도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하나님의 흔드심: 칼 바르트의 성화론 서문, 2010년 9월초 출간, 새물결 출판사]

출처: http://www.jsrhee.com/WR

관련기사:
http://www.newsnjoy.co.kr/news/articleView.html?idxno=34821

7.27.2011

<리버티헤랄드> 논객님들께

필명 '익명' 님과의 대화를 끝으로 저는 이제 퇴장하고자 합니다. 누구이신지도 알지 못하고, 아주 짧고 간결한 대화였지만, '익명' 님의 인품을 단번에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익명 님의 말씀에 신뢰가 갑니다.

그동안 제 사랑스러운 아내와 어린 아들을 뒷전으로 하고 밤잠을 설쳐가며 이 토론에 집중해왔습니다.(지금 시애틀은 새벽 3시 16분입니다.) 그 정도로 오대원목사님의 사역도 귀하고, <리버티헤랄드> 논객 여러분들의 사역도 역시 귀하다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실명을 당당하게 밝혀주신 H.Y. 님, P.Y. 님, J.M. 님, K.M. 님, K.H. 님, C.E. 님, 그리고 C.J. 님, 혹시라도 제가 여러 형제님들 자매님들의 인격을 모독했거나 무시했다면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해주시길 바랍니다.

그러나, 저는 오대원목사님의 『김정은이 요시야처럼 되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자』라는 발언이 지극히 성경적이고 복음적이라고 확신합니다. 김정은을 '사탄' 또는 '사탄의 새끼,' '특정한 적그리스도,' 또는 '짐승(계11:7)' 등으로 부르거나 그렇게 규정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서 이 인간을 제외시켜 버리는 것은 오히려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을 불신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도 역시, 살아계시는 하나님의 '불가항력적 은혜(不可抗力的 恩惠)'에 저항할 수 없는 죄인일 뿐입니다. 여러분들은 이미 다 알고계시는 내용이겠지만 말입니다.

우리는 알 수 없는 하나님의 신묘막측(神妙莫測)한 뜻이 있어서 김정은이를 요시야처럼 되게 해 주신다면, 그는 분명히 모든 반(反)기독교적인 악행을 멈추고, 온갖 우상숭배와 무신론적 경제제도(우상숭배에는 반드시 타락한 경제제도가 함께 갑니다.)를 철폐할 것이며, 처절한 눈물로써 자복(自服)하게 될 것입니다. 북한 내에서 자신의 권력은 점점 약화되고, 심지어 자기 자신과 가족들의 신변이 심각한 위험에 처하게 되더라도, 그는 반드시 친(親)대한민국, 친(親)자유민주주의, 무엇보다 친(親)"하나님 나라"적인 개혁을 감행하게 될 것이며, 어쩌면 암살을 당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내용들이『한반도의 참된 왕이시며, 천지만물의 영원한 주인이신 살아계시는 하나님 아버지, 북한의 김정은이가 요시야처럼 하나님의 절대 주권(主權)을 깨달을 수 있도록, 이 한반도에 은혜를 베풀어주십시오.』라는 짧은 기도에 함축되어 있습니다.

다만, 요시야왕의 말년에 대한 성경말씀의 교훈에 우리 모두가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부디 제 부족한 글을 최대한 열린 마음으로 읽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종교적, 정신적, 경제적, 전(全) 사회적인 개혁에서 성공적이었던 이스라엘의 왕 요시야의 말년은 그다지 좋지 못했습니다. 역대하 35장에 보면, 요시야는 애굽의 왕 느고의 궁수들이 쏜 화살에 맞아서 죽게됩니다. 눈여겨 봐야 할 부분은, 바로 그 앞부분에 다음과 같은 놀라운 내용이 나온다는 점입니다.


이 모든 일 후 곧 요시야가 성전을 정돈하기를 마친 후에 애굽 왕 느고가 유브라데 강 가의 갈그미스를 치러 올라왔으므로 요시야가 나가서 방비하였더니, 느고가 요시야에게 사신을 보내어 이르되 "유다 왕이여 내가 그대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 내가 오늘 그대를 치려는 것이 아니요, 나와 더불어 싸우는 족속을 치려는 것이라. 하나님이 나에게 명령하사 '속히 하라' 하셨은즉,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니 그대는 하나님을 거스르지 말라. 그대를 멸하실까 하노라." 하나 요시야가 몸을 돌이켜 떠나기를 싫어하고 오히려 변장하고 그와 싸우고자 하여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느고의 말을 듣지 아니하고 므깃도 골짜기에 이르러 싸울 때에 (역대하 35:20-22)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느고의 말을 듣지 아니하고." 저 자신에게는 바로 이 말씀이 오늘 저에게 들려주시는 살아계시는 하나님이 음성으로 전해집니다. 즉, 지나친 적개심(敵愾心)과 '(하나님 없이) 내가 스스로 이 상황을 주도하겠다'는 영적인 교만으로 인하여, 시끄러운 세상의 잡음을 뚫고 내 귀에 들려지는 살아계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무시하게 될 수도 있다는 메시지 입니다.


존 스토트(John Stott) 신부님에 의하면, "요시야는 26세의 젊은이로서 전국에 걸친 철저한 개혁에" 나서게 됩니다. 그는 개혁의 일환으로 성전(聖殿)을 재건하기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오래전에 사라진 줄로만 알았던 "율법서"를 발견합니다. 그래서 그는 "백성을 '무론 대소하고' 광장에 모으고 발견된 율법서를 친히 그들에게 읽어"주었다고 합니다. "그리고서는 그는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새롭게 하고 앗시리아와 가나안의 우상들을 성읍과 지방에서 없애고, 산당들을 없애며, 강신술과 유아 희생을 금하고, 예루살렘에서 유월절을 지키라고" 명령하기에 이릅니다. 이때 요시야의 개혁을 격려하고 도와주었던 인물이 바로 선지자 예레미야입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그 "개혁이 피상적일 뿐임을 슬퍼"하였다고 합니다. 이때 선지자 예레미야가 쓴 책이 구약성경의 "예레미야"이며, 패망(敗亡)할 이스라엘의 앞날을 내다보며 슬픔의 눈물로 쓴 책이 바로 "예레미야애가"입니다.


이 모든 일이 있어도 그의 반역한 자매 유다가 진심으로 내게 돌아오지 아니하고 거짓으로 할 뿐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렘 3:10)

『예레미야는 종종 사람들의 악한 마음의 '완고함'과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 임을 지적하고, 하나님이 그의 법을 사람들 속에 두고 그것을 그들의 '마음에 쓸' 때 즉 새 언약의 날을 바라보았다(렘 7:24; 17:9; 31:33). 그 뒤에 된 일은 예레미야가 옳았음을 증명하였다. 요시야가 주도한 개혁의 결과는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그의 아들 여호야김이 그의 선한 일을 재빨리 뒤엎었다. 새 왕은 호화스러운 궁전을 짓기 위하여 강제노역을 시킨 듯하며, 그래서 예레미야의 맹렬한 책망을 받았다.』(존 스토트, 성경연구입문, 86쪽)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느고의 말을 듣지' 아니한 요시야의 교만을 정의로우신 하나님은 좌시하지 않으셨습니다. 사실, 이것은 요시야 개인만의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의 표현대로, 남 유다의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진심"으로 하나님을 주인으로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발견된 '율법서'의 내용을 "피상적"으로 받아들이고 그 형식은 갖추되, 살아계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으로 받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로써, 스스로 상황을 주도하려는 치명적인 교만에 빠진 이스라엘의 왕 요시야가 살아계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경시(輕視)하는 우매함을 저지르는 것일 뿐입니다. 그리하여 요시야 이후 이스라엘은 급속도로 쇠망(衰亡)하게 되었고 마침내 열강(列强)의 포로가 됩니다.


그들이 순종하지 아니하며 귀를 기울이지도 아니하고 자신들의 악한 마음의 꾀와 완악한 대로 행하여 그 등을 내게로 돌리고 그 얼굴을 향하지 아니하였으며 (렘 7:24)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렘 31:33)

어떤 강사나 설교자의 발언을 분석하거나 해석할 때, 아무리 비판하는 입장에 있다고 하더라도, 우선 그 설교나 강의내용 전체를 객관적으로 들어봐야 하며, 어떤 부분에 대해서는 역설적(逆說的)인 관점을 적용할 수도 있어야 합니다. 오대원목사님의 발언이, 김정은이가 요시야의 말년처럼 비참한 최후를 맞고, 그 후대에 북한이 중국 등에 의해 또다시 강점(强占)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듯이 말입니다.

오대원 목사님의 설교나 가르침의 내용은 단순하고 쉬워 보이지만, 항상 그 단순함 이면에 매우 깊은 영적인 교훈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특별히, 선교사의 자질에 대해서 가르치실 때 항상 강조하시는 것은 "겸손," "섬김," 그리고 "종됨의 도" 등입니다. 요즘 유행하는 '리더쉽'이나 '왕의 기도,' 이런 강의는 거의 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강조하시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스스로 성경말씀을 묵상하여, 성경말씀을 통해 살아계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대원목사님의『김정은이 요시야처럼 되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자』라는 말에서 저에게 강조되는 부분은 역시 "하나님께 기도하자"입니다. 오 목사님의 이 발언은, 이스라엘의 왕 요시야 이야기 전체를 토대로, 참으로 역설적(逆說的)이게도, 자기 귀에 들려진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여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요시야의 우매함을 반복하지 말자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 무엇보다 우리 한국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진심"으로 묵상하여, 오직 자유케 하시는 "진리"(요 8:31-38) 곧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마 4:4)에 의지해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와 헌법에 대한 수호정신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앞에 가 있어서는 안됩니다.

저를 아낌없이 비판해주시고, 날카롭게 분석하고 지적해주신 형제님들 자매님들께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다시 한번, 그동안 제 글로인하여 인격적 모독을 느끼셨거나, 불쾌하셨던 분이 있다면, 부디 그리스도의 보혈의 은혜 안에서 용서해주십시오. 그리고, 제가 이렇게 <리버티헤랄드> 댓글논쟁에 참여한 것은, 저 개인의 자유의사에 의해서였습니다. 오대원 목사님이나 안디옥국제선교훈련원 간사님들은 저같이 무모(無謀)하지 않다는 점 역시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죄송하고, 감사합니다. 샬롬!

<리버티헤랄드>와 <모아카데미>가 더욱 번성하고, 잘되기를 하나님께 기도하겠습니다. 샬롬!

7.17.2011

김정은도 요시야도 아니다! 오직 하나님이시다!

조갑제닷컴에 게재된 필명 '예레미야애가' 님의 "한국교회를 (新)신사참배로 유도하는 외국인 목사"라는 글에 대한 반론입니다.

대한민국 애국세력을 대표하는 인터넷 정론(正論)매체로 알려진 "조갑제닷컴" 웹싸이트에 또다시 안디옥국제선교훈련원 원장이신 오대원(David E. Ross)목사를 아무런 근거 없이 폄하(貶下)하는 글이 게재되었습니다. 다른 부분에 대해서는 언제나 사실전달 정신에 충실한 "조갑제닷컴"이 왜 유독 오대원목사에 대해서만큼은 전혀 근거없는 왜곡을 방치할 뿐 아니라, 이렇게 적극적으로 방조(幫助)하고 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지난해 9월 22일에도 역시 "조갑제닷컴" 웹싸이트에 실린 비슷한 의도의 공개서신(김성아, "오대원 목사님께") 내용에 대하여 필자는 적극적인 자세로 반론글을 제시한 적이 있습니다. 물론, 개인적인 경험담을 소신껏 밝히신 김성아 님의 진지함 자체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존중을 표하지만, 사실과 다른 부분에 관하여서는 분명한 반론을 제시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에 또다시 그때 그 공개서신을 중심으로 하는 근거없는 비방성(誹謗性) 글이 필자가 좋아하는 "조갑제닷컴" 웹싸이트에 게재되었습니다. 정말 실망스럽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번 기회로 분명한 문제제기를 하고자 합니다.

우선, 筆名 '예레미야애가' 님의 글 중에 "2. 오대원 목사가 북한선교 캠프에 초대한 인물들"이라는 부분은 순전히 김성아 님의 공개서신을 재탕한 것입니다. 이 내용에 대해서는 필자의 블로그에 이미 실려있는 "한동대국제어문학부 K. 자매님께"라는 글을 참조해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3. 한국 기독교는 점령당하고 있다!"라는 부분은 오대원목사와 전혀 상관이 없는 내용이므로 그냥 무시하도록 하겠습니다. 네번째, "진짜 북한 교회는 순교자의 몸이다"라는 부분은 사실 오대원 목사님 본인의 가르침("북한의 숨겨진 교회," "고난 당하시는 종의 모습으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 "섬김의 도" 등)이며 필자 역시 적극적으로 동의하고 있는 내용이므로 굳이 반론을 제기할 이유가 아예 없습니다. 그러므로, "1. 김정은이 요시아왕처럼 되다니!"라는 부분에 대해서만 집중해서 비판하겠습니다.


『김정은이 요시아왕과 같이‘거룩한 전통’에 있는 왕(?)인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다윗, 솔로몬으로 이어지는 거룩한 전통에 ‘김정은’을 두고 빗대어 기도하는 것이 기독교 목사가 신성모독임을 모를 수 있을까?』(필명 "예레미야애가" 님의 글에서 발췌)
이 부분에서 예레미아애가 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다윗, 솔로몬으로 이어지는" 혈통을 일컬어 "거룩한 전통"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과연 성경 이야기의 주요 등장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사람들이 거룩했습니까? 과연 이들의 인간적 성품이나 "전통" 자체에 거룩함이 있었습니까? 이런식의 발언은 이미 그 자체가 거룩함이 무엇인지를 전혀 알지 못한다는 증거입니다.

인간은 오직 거룩하신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만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세상 그 어떤 사람도 하나님의 은혜 없이 스스로 거룩해질 수 없습니다. 다윗과 솔로몬의 삶을 한번 보십시오. 다윗은 한낱 정욕을 이기지 못해 자신의 충신인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취하기 위하여 자신의 절대적 권력을 남용해 우리아를 죽음의 상황으로 몰아넣었습니다. 또한, 그의 아들 솔로몬은 아내만 700명이었고, 첩은 300명이었습니다. 게다가, 이 수많은 여인들이 이방에서 들여온 온갖 우상숭배를 그대로 방치하여 결국 이스라엘이 망하게 되는 고속도로를 뚫어주었습니다. 그런데도 과연 이들의 전통을 거룩하다고만 할 수 있겠습니까?

더욱이, 요시야의 친할아버지 므낫세는 하나님의 성전에 우상숭배를 들여왔고, 그의 아들이자 요시야의 아버지인 아몬은 므낫세의 '우상숭배의 전통'을 그대로 물려받았습니다. 특별히 므낫세의 경우, 그 만행이 어찌나 악랄했으면 성경은 그에 대하여 "므낫세가 유다에게 범죄하게 하여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악을 행한 것 외에도 또 무죄한 자의 피를 심히 많이 흘려 예루살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가득하게 하였더라."(열왕기하 21:16)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시야는 달랐습니다. 할아버지, 아버지를 통해 물려받은 사악한 '우상숭배의 전통'을 타파(打破)하고, 성전을 본래의 거룩한 목적을 위해 재건하였으며, 유월절(逾越節)을 회복시키는 등 당시 타락할데로 타락해 있고 부패할데로 부패해 있던 이스라엘 민족의 정신세계를 근본적으로 개혁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아마도 오목사님은 요시야의 바로 이런 점을 강조하신 것으로 여겨집니다.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은 ‘우상을 숭배하여’몰락한 이스라엘왕이 아니라 그들 자신이 ‘우상’이며 그것도 지구상에 존재한 적도 없는 극악한 우상이다. 바알과 아세라가 요시아왕과 같이 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인가? ......』(필명 "예레미야애가" 님의 글에서 발췌)
우상숭배의 본질은 자기숭배입니다. 내 안에 이미 존재하는 거짓된 허상을 단지 실재하는 어떤 인물이나 물체, 형상, 또는 경험이나 겉으로 나타나는 현상 따위에 의존시키는 과정에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김일성, 김정일이 우상이라면, 그들은 그들 자신 안에 있는 거짓된 허상(虛像)을 자기 자신의 형상으로 의존시켰을 뿐입니다. 자기 자신을 숭배하든지 아니면 타인을 숭배하든지 간에 그 차이는 겉으로 나타나는 현상이 다를 뿐, 본질적인 면에서는 동일한 우상숭배입니다. 요시야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추구하던 우상숭배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즉, 살아계시는 하나님을 무시하고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자리에 서고 싶은 인간의 본질적인 교만이야말로 모든 우상숭배의 대상이며 근원입니다.

열왕기하 22장에서 23장 사이에 나오는 요시야의 이야기를 잘 읽어보십시오. 특별히 22장 1절에서 2절 내용을 읽어보시면 아무런 부연설명 없이 갑자기 요시야가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진지하게 주목해봐야 할 점은, 팔 세에 즉위(卽位)한 요시야의 성장배경은 우상숭배가 팽배(澎湃)하고 전혀 거룩하지 못한 환경이었다는 점에 있습니다. 오대원목사님은 바로 이 부분에서 조명(照明)되는 성경말씀의 메시지를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한국인들에게 전하신 것으로 여겨집니다. 성장배경, 가정환경, 그리고 사회적 분위기는 철저하게 타락하고 하나님을 적대시하여 우상을 섬기고 있더라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때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으로, 영원하신 절대자 하나님께서 역사(歷史)에 직접 개입하신다는 것입니다.

과연 요시야 자신의 혈통(血統)이 좋았느냐?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우상숭배라는 점 자체로 보자면, 김일성이나 요시야의 할아버지 므낫세나 마찬가지이며, 김정일이나 아몬이나 별반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 그렇다면, 요시야의 인간적인 재능 따위가 유난히 뛰어나서 할아버지 므낫세나 아버지 아몬이 배반한 야훼 하나님의 영원하신 뜻을 스스로 깨달았느냐? 역시 아닙니다. "요시야가 왕위에 오를 때에 나이가" 겨우 팔 세였습니다. 여덟 살 어린아이가 잘났으면 얼마나 잘났겠습니까. 다시 말씀드리자면, 오직 영원하신 절대자 하나님만이 역사의 주인이십니다. (바로 이 부분에서 정통 기독교와 무신론적 휴머니즘 사이에 큰 차이가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오대원목사님의 "북한의 김정은이 이스라엘의 요시아왕처럼 되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자"라는 말에서 강조되어야 할 점은, 김정은이나 요시야가 아니라, "하나님께 기도하자"입니다. 筆名 '예레미야애가' 님의 글은 바로 이점을 왜곡하고 있으며 극구 폄하하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요시야가 잘나서 또는 그의 "전통"이 거룩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요시야를 높여주셨다는 내용은 전혀 없습니다. 다만, 전지전능(全知全能)하시며 무소부재(無所不在)하시고 영원하신 절대자 하나님께서 친히 역사에 개입하시어, 요시야를 통해 하나님 자신의 뜻을 이루셨다는 사실을 암시(暗示)해주고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께 불가능이란 없습니다. 김정은이라고 바뀌지 말라는 법은 없습니다. 그런데 뜸금없이 "신성모독"이라니 이게 웬말입니까!


2.19.2011

"왜 다(多)문화주의는 실패했나"





One Culture, Many Contributors:Why Multiculturalism Can't Work By: Chuck Colson Published: February 16, 2011 12:00 AM Topics: International Affairs, Islam, Religions, Sociology



>>하나의 문화, 많은 공헌자들: 왜 다(多)문화주의는 실현될 수 없는가 찰스 콜슨 2011.02.16 12:00 AM


Multiculturalism is the antithesis of American culture. Find out what I mean, and why it’s so, next on BreakPoint.

>>다문화주의(多文化主義)는 미국 문화에 반립(反立)하는 것입니다. 다음 브레이크포인트에서 제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그리고 왜 그런지 확인해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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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tish Prime Minister David Cameron horrified European elites when he recently proclaimed that multiculturalism has failed. The idea that all cultures are equal and that they can live happily side by side in one country is false. It just doesn’t work.

>>최근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가 '다(多)문화주의는 실패했다'는 공언(公言)을 해서 유럽의 엘리트층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모든 문화들은 동등하며 한 나라에서 서로 행복하게 병존(竝存)할 수 있다는 발상은 거짓입니다. 이건 그냥 소용없는 일입니다.
Certainly millennia of human civilization should be proof enough. But there are plenty of modern examples. Look at Iraq. Only a brutal dictatorship could prevent the explosive clash of Sunni, Shiite, and Kurdish cultures. Once the dictatorship was gone, well, look what has happened.
>>물론 수천년의 인류 문명이 충분한 증명이 되어줄 것입니다. 그러나 현대의 사례(事例)들도 많이 있습니다. 이라크를 보십시오. 오직 무자비한 독재정권만이 수니파, 시아파, 그리고 쿠르디족 사이의 충돌을 방지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 독재정권이 없어진 이후, 과연 어떻게 되었는지 한번 보십시오.
And Prime Minister Cameron knows all too well that Britain can no longer ignore the danger of growing and competing cultures within its own borders—cultures that threaten British institutions and British national identity. This is especially relevant in Europe today because of the difficulty of assimilating Muslim immigrants.
>>캐머런 총리는, 이제 영국은 자국의 국경 접경지들 사이에서 고조되고 있으며 대립하고 있는 문화들의 위험성에 대하여 더이상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이 문화들은 영국의 제도와 영국의 국가 정체성을 위협하는 것들입니다. 이 문제는 특별히 오늘날 유럽에 상응하는 것으로써, 무슬림 이민자들을 동화(同化)시키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기 때문입니다.
The underlying reason for this is that culture reflects beliefs of the people. In fact, cultures are formed by those beliefs. For a society to survive it has to have one culture—a culture that enjoys the participation and contributions of all of its peoples.
>>이 문제의 근본적인 이유는, 문화가 사람들의 신념(信念)을 반영(反映)한다는 점에 있습니다. 사실, 문화들은 이런 신념들에 의해서 형성됩니다. 한 사회가 생존하기 위해서는 그 사회는 하나의 문화—모든 구성원들의 참여와 공헌들을 향유(享有)하는 문화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Look at the United States. Our national motto is "e pluribus unum," or "out of many, one." Multiculturalism fails because it denies the need for the "one," for unity, and in our case, for a shared commitment to the American creed: "We hold these truths to be self evident, that all men are created equal, that they are endowed by their Creator with certain unalienable rights, that among these are life, liberty and the pursuit of happiness."
>>국을 보십시오. 우리의 국가적 표어는 "에 플러리버스 우넘," 또는 "다수로 이루어진 하나"입니다. 다(多)문화주의가 실패하는 이유는 바로 이 "하나," 즉 일치의 필요성을 부정하고 있기 때문이며, 우리의 경우, "우리들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자명한 진리로 받아들인다. 즉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고, 창조주는 몇 개의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부여했으며, 그 권리 중에는 생명과 자유와 행복의 추구가 있다"고 선언하는 미국의 신조(信條)에 대한 공동 헌신을 부정하기 때문입니다.
Many around the world marveled that the American people elected a black president. I didn’t see it as a surprise. I saw it as a vindication of the American creed. A creed, we must never forget, that is founded on the Christian belief that all people are created in the image of God.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미국인들이 흑인 대통령을 당선시켰다는 것에 경탄(驚歎)했습니다. 저는 이것을 놀라운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것이 미국의 신조에 대한 입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절대로 잊어서는 안될 이 신조는,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다는 크리스천 신앙(信仰)에 그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And it is a creed that has allowed us to assimilate peoples of all races and languages into American culture. Just last week I addressed 800 people at Berkley as part of our nationwide tour promoting ethics. The Christian Fellowship at Berkley is largely made up of Koreans and Chinese. But they were there because they, too, want to see American life reinvigorated by a renewed commitment to ethical behavior.
>>그리고 바로 신조라는 것이 모든 인종과 언어의 사람들로 하여금 미국 문화로 동화될 수 있도록 우리를 허용해주었던 것입니다. 바로 지난주에 저는 윤리의 증진을 위한 전국순회의 한 부분으로 버클리에 있는 800 명의 사람들에게 연설했습니다. 버클리에 있는 이 크리스천 모임(Koinonia Christian Fellowship)은 대부분 한국인들과 중국인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 역시 미국인들의 삶이 윤리적 행동을 위해 갱신(更新)된 헌신으로 인하여 다시 활력(活力)을 되찾는 모습을 보기 원해서 그자리에 모여 있었습니다.
Of course, American history is not always pretty when it comes to assimilation. But our failures were failures to live up to the American creed. In fact, you could say that up until 1861, America was a multicultural society. But the multiculturalism produced a Civil War. A free society and a slave society could not live side by side.
>>물론, 동화(同化)라는 면에 있어서 미국의 역사가 언제나 훌륭했던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의 실패들은 미국의 신조를 고수(固守)하기 위한 실패들이었습니다. 사실, 1861년까지 미국은 다문화주의적 사회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다문화주의가 남북전쟁(美:1861-1865)을 일으켰습니다. 자유 사회와 노예(奴隸) 사회는 서로 병존(竝存)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And it’s a national shame that it took another hundred years for African Americans to gain full civil rights. But it’s also the glory of our nation that African Americans insisted that they were Americans, and that they persisted to enjoy their God-given rights that should have been so self-evident to every American.
더욱이,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온전한 공민권(公民權)을 보장받기 위해 또 한번의 백년이 걸렸다는 것은 국가적인 수치가 아닐 수 없습닏다. 그렇지만 이것은 우리 나라의 영광으로써, 바로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스스로에 대하여 미국인이라는 것을 끈기있게 역설(力說)하였다는 것과, 모든 미국인에게 너무도 자명했어야 할 하나님이 부여하신 권리를 누리기 위하여 그들이 끝까지 관철(貫徹)하였다는 것입니다.
As I hope you know, we’re in the middle of Black History month. Today on my two minute warning, which I urge you to go watch at ColsonCenter.org, I reflect on the great achievements of several prominent African Americans—but with a twist. And that twist is the Christian faith of so many of the Black men and women who have helped shape our American culture.
>>여러분께서도 알고 계시기를 바라지만, 우리는 지금 '흑인역사의 달'을 보내고 있습니다. 오늘 저의 2분 경고(저는 여러분이 ColsonCenter.org에 가서 꼭 보실 것을 적극 권합니다.)에서는, 몇몇 저명한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위대한 업적에 대하여 생각해보았습니다—그러나 약간의 변화를 가미(加味)하였습니다. 이 가미된 부분은 바로 우리의 미국 문화 형성을 도왔던 수많은 흑인 남성들과 여성들의 크리스천 신앙입니다.
Remember, "e pluribus unum." Out of many one. And thank God for the many, especially as they make up the one.
>>"에 플러리버스 우넘," 기억하십시오. 다수로 이루어진 하나. 그리고 다수로 된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특별히 이 다수가 하나가 될 때 말입니다.


출처: http://www.breakpoint.org/bpcommentaries/entry/13/16429

번역: J.W. Shin / 申政遇 / jwjshin@hotmail.com


















/ http://koinonian.blogspot.com/






소개출처: http://hongsungsa.com/home/board.php?board=book&sort=user_add4&linkstep=1&shwhere=user_add2&search=%C2%FB%BD%BA+%C4%DD%BD%BC&wfrom=main

2.09.2011

"이집트 사태: 세계관적 조망(眺望)"







The Events in Egypt: A Worldview PerspectiveBy: Chuck ColsonPublished: February 1, 2011 11:07 AM
이집트 사태: 세계관적 조망((眺望)
찰스 콜슨 / 02.01.2011 11:07 AM



(Note: This article by Chuck Colson has been penned over the past few days as we have observed the turmoil in Egypt. Be sure and check out other things Chuck is saying in this context through BreakPoint commentaries this we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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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y time there’s a crisis in the Middle East, the first thought of many Christians is END TIMES. Tumultuous events like we’re witnessing now always raise the issue of the return of Christ, the fulfillment of biblical prophecy.

>>언제든지 중동(中東, Middle East)에서 위기사태가 발생하면,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우선적으로 떠오르는 생각은 종말(終末)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것과 같은 격앙되고 소란스러운 사건들은 언제나 그리스도의 다시오심, 즉, 성경적 예언의 성취에 대한 논쟁을 일으키게 합니다.

None of us know the time and place of Christ’s return, as He Himself told us we wouldn’t. So while there may be speculation, I think the most urgent question posed by what is happening in Egypt and elsewhere in the Middle East today is ‘What are the worldview implications of all of this?’

>>그리스도의 다시오심의 시간과 장소는, 그분 자신이 우리는 알 수 없다고 말씀하셨듯이, 우리 중 그 누구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추측은 난무할 수 있겠지만, 저는 최근 이집트와 중동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대한 가장 긴박한 질문은 '이 모든 사건에 연관되어 있는 세계관적 암시(暗示)는 무엇인가?'라고 생각합니다.
I’ve received many questions from people about this. Hence these few observations:


>>저는 이 사건과 관련하여 사람들로부터 많은 질문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주의깊게 관찰한 몇가지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1. The most obvious concern raised is whether this will fuel what Samuel Huntington described as the clash of civilizations. Huntington, in his book by that title in the mid-90s, predicted that the great titanic struggle of the 21st century would be between Islam and western culture formed by Judeo-Christian tradition.

>>1. 가장 명백하게 우려되는 점은 이 사건으로 인해 사무엘 헌팅턴이 설명했던 "문명의 충돌"이 부추겨 질 것인지에 있습니다. 90년대 중반에 "문명의 충돌"이라는 제목으로 펴낸 자신의 책에서 헌팅턴은, 21세기에 가장 크고 거대한 분투는 기독교 전통에서 형성된 서양문화와 이슬람 사이에 일어나게 될 것이라고 예측했습니다.

There could be no grimmer outcome from the current turmoil than for the Muslim Brotherhood to gain the upper hand in Egypt, and Islamist parties to gain ground in Jordan, Tunisia, Lebanon, and elsewhere. Hamas, which is after all a subsidiary of the Muslim Brotherhood, has already had some successes in Lebanon.

>>최근 소요사태의 결사적인 성과보다 더 무슬림형제단으로 하여금 이집트에서 우세한 위치를 확보하게 하고, 이슬람주의적 정당들로 하여금 요르단, 튀니지, 레바논, 그리고 다른 지역에서 기반을 마련해주는 것은 없을 것입니다. 레바논에서는 벌써, 무슬림형제단의 보조격일 뿐인, 하마스의 성공사례들이 있었습니다.

Christians should understand the fundamental differences between Islam and Christianity. We can’t be very good advocates of our own belief system if we can’t draw that comparison in a very honest and sincere way. We also are obligated to distinguish radical Islam, that is the jihadist movement, from peace-loving Muslims. This is not only a matter of being fair and objective in our evaluation, it’s a matter of not fanning the flames of what could turn into a worldwide conflagration. The best estimate I’ve heard (in conversation with a prominent pollster) of the number of Muslims who are in sympathy with the jihadist movement is 18 percent. We do know that maybe 10 percent of the Muslims in Egypt are part of the Muslim Brotherhood. That could be a decisive bloc.

>>기독교인들은 반드시 이슬람과 기독교의 근본적인 차이점을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 차이점에 대하여 매우 진지하고 신실하게 설명할 수 없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신앙관(信仰觀)에 대하여 제대로 대변할 수 없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극단적 이슬람, 즉, 지하드 운동가들과 평화를 사랑하는 무슬림-사람들을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공정하거나 객관적인 검토를 위한 문제만이 아니라, 자칫하면 세계전체에 큰 화재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불꽃에 부채질을 하는 문제가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신뢰할만한 여론 조사관으로부터) 제가 들은 가장 정확한 견해에 의하면, 지하드 운동에 동조하는 무슬림-사람들의 수는 18퍼센트라고 합니다. 우리는 이집트의 무슬림-사람들 중에서 대략 10퍼센트 정도가 무슬림형제단에 속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들은 결정적인 세력권이 될 수도 있습니다.

The West cannot deal with this crisis if we do not understand the dynamics of the Muslim world and particularly the jihadist wing of Islam. This is a very volatile and very dangerous movement which civilized nations should do everything they can to contain.

>>만약에 우리가 무슬림 세계의 역학(力學)관계에 대하여, 그리고 특정하게 이슬람의 지하드 세력에 대하여, 이해하지 못한다면, 서양(西洋)은 이번 소요사태에 대한 바른 대처를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매우 파열적(破裂的)이며 위험한 움직임으로써 문명화된 국가들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해 견제해야 합니다.

The idea that we can fight terror without understanding who perpetrates terror and why they do it is dangerously delusional.

>>테러의 주동자가 누구인지 그리고 왜 테러를 일으키는지 이해하지 않고서도 테러를 상대로 싸울 수 있다는 발상은 위험할 정도의 착각입니다.

2. The second big issue that rises to the fore in all of today’s turmoil is the dignity of human life. Christians believe that all humans--Christians, Jews, Muslims, Hindus, atheists, and everyone else—are created in the image of God. Every human, therefore, has an innate dignity. And God, who Himself has free will, gave the gift of free will to human beings. Free will, the desire to be free, is part of our nature.

>>2. 요즘 일어나고 있는 모든 혼란의 전면에 나타나고 있는 두번째 큰 문제는 인간 생명의 존엄성에 관한 것입니다. 기독교인은 모든 인간들—기독교인이든, 유대인이든, 무슬림이든, 흰두교인이든, 무신론자이든, 그 누구든—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다는 것을 믿습니다. 모든 인간에게는, 그러므로, 본유(本有)의 존엄성이 있습니다. 스스로 자유의지가 있으신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자유의지, 즉 자유롭고자 하는 욕구,는 인간 본성의 한 부분입니다.

What we are witnessing in the Middle East today is the irrepressible desire for freedom that is wired into every human being. The biblical worldview is the only worldview which recognizes this, which clearly sets forth man as created in the image of God with innate dignity.

>>최근 중동문제를 통해서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것은 모든 인간 내면에 이미 접합(接合)되어 있는 자유에 대한 억누를 수 없는 열망(熱望)입니다. 오직 성경적인 세계관에서만 바로 이점에 대한 인식, 다시 말해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으며 본유의 존엄성을 지닌 존재라는 점을 명확하게 진술합니다.

In cultures which are informed by Judeo-Christian truth therefore, there is a built-in respect for human beings and human freedom—we do see this as a self-evident truth (as we read in the Declaration of Independence); no other worldview sees human beings this way. So no other worldview forms its governing structures in a way to cause freedom to flourish. This is one of the things that distinguishes a culture informed by Christian revelation from one that is not.

>>그러므로 기독교 진리에 의해 숙련된 문화에서는 인간의 존재와 자유에 대한 내재(內在)된 존중이 있으며—우리는 이것을 자명한 진리로 알고 있습니다(마치 우리가 미국 독립선언문에서 읽을 수 있듯이 말입니다); 다른 어떤 세계관도 인간 존재를 이와같은 태도로 대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어떤 세계관도 그 정부체제로 하여금 자유가 융성하도록 하지 못합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계시에 의해 숙련된 문화와 그렇지 않은 문화를 구별짓는 여러가지들 중에 하나입니다.

The Islamic worldview, for instance, does not hold that humans are made in the image of God (that, to them, would be akin to idolatry). And instead of freedom, the Islamic worldview sees submission to Allah as the ultimate goal. It is not surprising, therefore, that there really is no grounding in Islamic countries, not even a reasonable familiarity, with the basic concepts which would enable democracy to thrive.

>>예를 들어서, 이슬람의 세계관에서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졌다는 것(이들에게 이것은 우상숭배와 비슷한 것이 됩니다)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슬람의 세계관에서는, 자유가 아닌, 알라에 대한 복종이 궁극적 목표입니다. 그러므로, 이슬람 국가들에는 민주제(民主制)가 번영하기 위한 그 어떤 기초 작업도 되어 있지 않으며, 합리적인 친숙함은 물론이요, 기본적인 개념조차도 전혀 없다는 것이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A very cogent argument can be made that only the Christian worldview best accommodates man’s innate desire for freedom, but balances it with the necessary order so that freedom does not become license. We as Christians have a very, very appealing worldview to those who think through these kinds of questions.

>>오직 기독교 세계관만이 자유에 대한 인간 본유의 욕구를 제대로 다룰 수 있으며, 그러나, 자유가 특허가 되지 않도록 필요한 질서와 균형을 잡아줄 수 있다는 것에 대하여 매우 설득력 있는 토론을 해 볼 수 있겠습니다. 이러한 문제들에 대하여 고민 중에 있는 사람들에게 기독교인으로써 우리는 매우, 매우 매력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3. What we are witnessing in the Middle East today, as we’ve been witnessing in China, and before that in the Soviet Union, is the control of the state and governing elite over the means of communication. All tyrants recognize that free discourse among a people will undermine the tyrant’s authority. This is why in every crisis authoritarian regimes close down the fax machines (in the case of the Soviet Union, as I discovered when I visited there in 1990), monitor telephones, and now of course turn on and turn off the Internet. With the flip of the switch, free dissent within a society can be silenced. Notice that the dissidents in Egypt took to the streets only after they had built up large numbers of adherents via social networking on the Web.

>>3. 최근 중동문제로부터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것은, 우리가 그동안 중국에서 목격해 오고 있으며, 그리고 예전에는 소련에서 볼 수 있었던 것, 그것은 바로 정부와 지배계급 엘리트들이 소통의 방법을 장악하여 통제하는 모습입니다. 모든 폭군은 사람들 사이에 있는 담론의 자유가 폭군의 권력을 위태롭게 할 것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왜 독재적 정권이 모든 혼란을 대할 때 팩스기 사용을 전면 금지시키고( 소련의 경우, 1990년에 제 자신이 이 사실을 직접 경험했습니다.), 전화통화를 감청하며, 그리고 지금은 당연히 인터넷을 임의로 연결했다 끊었다 하는 이유입니다. 스위치를 '탁' 내리는 것만으로, 한 사회의 이견(異見)의 자유를 그냥 침묵시킬 수 있습니다. 주목해서 볼 부분은, 우선 인터넷 온라인 인맥구축(소셜 네트워크) 웹사이트를 통해 많은 수의 지지자들이 생긴 후에야 비로소 이집트에서 반정부 시위대가 길가로 나오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What this tells us is that free societies survive on the free flow of information. We must guard freedom of speech and communication. It is on well-reasoned discourse that civilization advances, as Aquinas noted so eloquently. Conversation is at the heart of democracy.

>>이것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자유로운 사회는 자유로운 정보의 흐름 위에서만 존속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언론의 자유와 소통의 자유를 보호해야 합니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가 매우 능변적(能辯的)으로 언급했다시피, 문명은 충분한 이성에 근거한 대화 위에서만 발전합니다. 대화는 민주제의 중심부에 있습니다.

If there’s an object lesson about what we’re seeing in China today and in the Middle East, it is that every Christian should be working diligently to preserve free dissent, free civil discourse—they are key to the preservation of our all our freedoms.

>>만약 우리가 오늘의 중국이나 중동에서의 문제로부터 어떤 객관적 교훈을 발견할 수 있다면, 그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은 '이견(異見)'의 자유, 자유로운 '시민 담론(談論)'을 보존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바로 이렇게 하는 것이 우리 자신들의 자유를 지키기 위한 열쇠라는 것입니다.

There will be other worldview aspects to be discussed as this situation unfolds. We as Christians can view it only with the deepest concern that the situation be contained and that order be preserved.

>>이 상황이 전개될수록 세계관의 다른 면들에 대하여 토론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그리스도인으로써 우리는 상황이 침착하게 자제되고 질서가 유지되기를 바라는 깊은 우려의 마음으로 지켜봐야 합니다.

Chuck Colson
February 1, 2011




영문 원본 출처: http://www.colsoncenter.org/hottopics/entry/31/16319

번역: J. W. Shin / 申政遇 / jwjshin@hotmail.com /
http://koinonian.blogspot.com



소개 출처: http://hongsungsa.com/home/board.php?board=book&sort=user_add4&linkstep=1&shwhere=user_add2&search=%C2%FB%BD%BA+%C4%DD%BD%BC&wfrom=main

1.28.2011

한국 改新교회여, 뱁새가 황새 따라가다 가랑이 찢어진다!

:
"뱁새가 황새 따라가다 가랑이 찢어진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남이 한다고 제힘에 겨운 일을 따라 하려면 도리어 낭패를 당한다'는 뜻으로 예로부터 한국 민간에서 구두로 전해져 내려오는 세언(世諺)인데, 최근 불교계에서 이 속담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내놓았습니다.

"붉은머리오목눈이"라는 박샛과 조류에 속하는 뱁새는 그 덩치는 작고 다리도 짧아 볼품 없어 보일지 모르지만, "출혈성 열병의 병원체 바이러스를 보균하고 있는 사실이 밝혀진 것" 말고는, 한국에만 서식하는 이로운 텃새로써 각종 곤충을 잡아먹고 붉은 빛의 부드러운 털과 작고 아담한 크기 때문에 한국인이 좋아하는 새 중에 하나라고 합니다. 반면, 그 큰 덩치와 무섭게 생긴 부리와 눈 그리고 징그럽게 생긴 긴 다리를 가지고서 늪지대에 사는 물고기와 개구리 따위를 잔인하게 살육하고, 농사의 효율성을 위해 논에 풀어놓는 미꾸라지를 마구 잡어먹는 황새보다는 오히려 더 친근하게 느껴지는 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뱁새가 황새를 따라가다 다리가 찢어진다는 속담의 진정한 의미는 단순히 '내 능력 이상의 불가능해 보이는 일은 아예 처음부터 포기하라'는 소극적인 뜻이 아니라, '스스로의 정체성과 있는 모습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깨달아 자신만의 고유하고 독특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적극적인 의미라는 것입니다. [1]

이런 한국의 민간 속담 하나에 대해서도 깊은 의미를 부여하여 나름의 종교적 지혜를 가르치고자 부단히 노력하고 있는 불교인들의 명상적 자세에 대해서는 언제나 진지한 경의를 표합니다.



그런데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소위 '템플스테이(Temple-Stay)' 문제나, 개신교 법조인들의 모임인 '애중회' 예배에 참석한 교계(敎界) 장로이며 국회의원인 황우여 의원의 발언에 대하여 뜸금없이 '종교차별' 운운하며 불필요한 시비를 걸고 있는 한국 불교계의 요즘 모습은 정말 실망스럽고 추해보이기까지 합니다. [2] , [3]
한편, 마치 '황새를 따라가려는 뱁새'와 같이, 기독교계에서도 일명 '처치스테이(Church-Stay)'라는 명칭으로 불교계의 아둔함을 모방하려는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습니다. '처치스테이'라는 용어 자체가 문제이거니와, 기금 조성을 위한 사업계획 따위로 기독교 교육을 논하는 인물이 한국 개신교를 대표하는 연합체의 총수가 되었다는 것이 한탄스럽지 않을 수 없습니다. [4]
한국 불교가 지금과 같이 부패하고 깊이가 없는 삼류 종교로 떨어지게 된 그 현실적인 원인에 바로 '템플스테이'와 '문화재관리기금법' 등 불경(佛經)의 가르침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정부의 재정정책이나 이른바 "국가 브랜드를 높이는" 관광사업 따위에 열을 올리는 사판승(事判僧)들의 문제가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므로, 기독교 자력으로 하든 타력으로 하든 상관없이, 한국 불교의 1700년 긴 역사에 비교해 보았을 때 이제 겨우 130여년 정도의 비교적 짧은 한국 개신교의 역사를 문화관광화(化)하겠다는 명목 하에 그야말로 정략적인 사업계획을 공약하는 신임 한국 개신교 연합체 총수의 모습은 마치 '뱁새가 황새 따라가다 가랑이 찢어지는' 형국이 아닐 수 없습니다. [5]

한국 개신교의 문제는 수도원적 영성(修道院的 靈性: Monastic Spirituality)이 결여된 데 있는 것이지 돈이 없거나 부족한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더욱 가난하고 고독해져야 하며; 오직 하나님의 임재만을 연습하고 의지해야 하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소위 신비적(神祕的: Mystical) 관계를 형성하기 위하여 모든 것을 포기하는 삶, 즉, 성령의 충만함을 매일의 생활 속에서 누리는 존재양식에 모든 것을 헌신하는 삶의 가치를 증진하고 장려해야 하며; 복음의 영향력이 아직 미치지 않은 소외(疎外)되고 어두운 곳을 향하여 세상과 역류(逆流)를 타는 것(Romans 12:1,2)이 곧 한국 改新교회가 양적 성장의 분위기에서 질적 성숙의 깊이로 실제적인 업그레이드를 할 수 있는 길입니다.

역사적인 관점에서, 개혁주의 전통에 서 있는 한국의 개신교 기독인들은, 클레르보의 성 버나드(St. Bernard of Clairvaux: 1090-1153)와 같은 중세 신비가들을 중심으로 일어난 수도원개혁운동이 종교개혁의 불씨가 되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샬롬!

j. w. shin

1.21.2011

Os Guinness "Sustaining Freedom"

Trinity Law School's God and Governing Conference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