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0.2010

라마단 특집: 이슬람의 도전 그리고 기독교적 숙고 3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마리아의 태중에 잉태되셨으며, 세상에 태어나 인간 부모 밑에서 일정한 성장기간을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죄인인 인간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분노의 대상이 되셨고, 우리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써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을 당하심으로 죄인인 인간으로 하여금 죄 사함을 받게 하셨다는 것이 복음의 핵심적인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죄사함'의 교리는 기독교에만 있는 가르침이 아닙니다. 이슬람교에도 죄사함의 교리가 있습니다.

이슬람교와 기독교 사이에는 죄에 대한 개념 자체가 다릅니다. 이슬람교는 원죄(原罪) 개념 자체를 부인하고,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누구나 죄 없는 선한 상태로 태어난다고"(출처:
중동선교회,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구원관 비교연구3-죄") 가르칩니다. 아담의 행위로부터 시작된 인류의 타락을 아예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슬람교에서의 '죄 사함'이란 무엇인가? 각자가 살아가면서 짓게되는 개인의 윤리적, 도덕적 행위의 죄에 대한 용서를 받는 것을 말합니다.

아래 비교표는 한국인을 상대로 이슬람의 교리를 가르치기 위하여 이슬람교측 한국선교부 웹싸이트에 기독교의 교리(左)와 이슬람교의 교리(右)를 비교해놓은 것의 일부분입니다. 특별히 '죄 사함'에 관련된 내용만 따로 떼서 모아보았습니다. (참고로, 이 비교표 원본에는 띄어쓰기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라마단 특선...." 첫 글을 보낼 때 이미 확인했듯이, 저는 이슬람교의 교리를 비판하거나 폄론(貶論)하고자 제 소중한 밤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위 비교표를 읽어보시면 도저히 그냥 묵고할 수 없는 이단적인 내용이라는 것을 쉽게 아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이 글을 쓰고 있는 이유는 이슬람의 도전에 비추어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기독교의 기본진리를 다시금 새롭게 그리고 더욱 깊게 성찰해보자는 뜻에서 입니다. 그러므로, 위 비교표 내용 중에 터무니없이 이단사설(異端邪說)적인 부분에 대한 기독교적 변증은 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면 이제 기독교에서 말하는 '죄사함으로 얻는 구원의 은혜는 과연 무엇인가?'에 대해서 생각해보겠습니다.

어제 보내드린 글에서 제가 신학적 용어 선택을 잘못한 부분이 있었습니다. 글 말미에서 한자어로 된 한글 "속죄(贖罪)"에 대하여 영어 단어 "Propitiation"을 사용한 것입니다. 이 단어 선택이 전혀 틀렸다고 할 수는 없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정확한 것은 아닙니다. 한자어 "속죄"에 대한 정확한 영어 단어는 "Expiation"이 정확합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전하신 구원의 복음은 "속죄(贖罪)" 그 이상을 의미합니다. 속죄는 그 행위의 대상이 죄를 속량하는 것 자체에 국한되어 있지만, 복음이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로써 얻는 구원의 역사(役事)는 죄를 사함받는 것 그 너머의 과정에 대해서까지 매우 상세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 3장 25절에서 "Propitiation(ἱλαστήριον)" 즉 "화목제물"이라는 구약적 단어를 매우 명확한 의도를 갖고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26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로마서 3장 23-26절)

기독교는 단순히 죄를 사함받는 수준에서 끝나는 종교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인간의 죄에 대한 속죄의 수준을 넘어서, 하나님의 "분노"를 달래어 다시 인간을 사랑하시는 분으로 돌리는 "화목제물"로써의 의미를 다루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속죄제물"이 되시어 죄를 속량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화목제물"이 되시어 인간을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하기 위한 모든 법적 절차 및 검증을 완료해 놓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일부 기독교 종파 내에서조차 이 "화목제물"의 교리를 무시하고, 하나님께는 분노와 같은 감정이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슬람의 저 위 비교표에 나열되어 있는 이단사설적인 주장은 기독교 내부에서도 종파(예를 들면: Unitarian Universalist)에 따라 많이 혼란스러워 하는 내용이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요즘 특히 한국 기독교계 젊은층에서 유행하고 있는 기독교-평화주의가 그 한 예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소위 평화지상주의적 기독교인들은 "용서"만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용서 그 이후의 단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는 거룩한 입양의 수준에 대해서는 그다지 깊게 생각하려 하지 않는 경향이 있어보입니다.

한국 개신교 역사에는, 손양원 목사님 같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전하신 거룩한 입양으로 이어지는 하나님의 구원의 복음을 직접 삶으로 실천하며 분투하신 신앙의 선배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어떤 축복보다 한국교회의 이 흐름을 이어 받은 우리 한국인 크리스천은 미국에 살면서 한국 개신교 역사에서 복음의 진수를 제대로 따르고자 희생하시고 순교하신 믿음의 선조들의 정신을 우리 후세들에게 전수해줄 의무가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우리(나) 자신이 그 정신을 실제적으로(행동으로 옮길 수 있을 만큼) 깨닫고, 나 자신의 삶으로 받아드리는 것이 먼저라는 생각이 듭니다.

다음편에서 계속....

샬롬!


j.w.s.





책 "나의 아버지 손양원 목사" 중에서


1948년 10월에 일어난 여수, 순천 반란 사건에서, 손양원 목사님은 자신의 두 아들을 모두 잃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단지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자신의 두 아들을 무참하게 살해한 좌익 바란군 청년이 잡히게 되자, 두 아들들을 대신해 자신의 양자로 삼으셨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의 이야기를 이렇게 함부로 인용해도 되나 싶어서 두려운 마음이 앞섭니다. 하지만, 제가 이 라마단 기간동안 매달리고자 하는 복음의 진수에 대해 이보다 더 적합한 예는 없다고 사려되기에, 순교한 두 아들의 영결식에서 손양원 목사님께서 직접 읽으신 감사문을 이자리에 옮기겠습니다. (저는 이 부분을 옮기기 위해서 조금전까지 손양원 목사님의 맏딸이신 손동희 권사님께서 쓰신 "나의 아버지 손양원 목사"라는 책을 다시 정독했습니다.)


"여러분, 내 어찌 긴 말의 답사를 드리리요. 내가 아들들의 순교를 접하고 느낀 몇 가지 은혜로운 감사의 조건을 이야기함으로써 답사를 대신할까 합니다.


첫째, 나 같은 죄인의 혈통에서 순교의 자식들이 나오게 했으니 감사.


둘째, 허다한 많은 성도들 중에 어찌 이런 보배들을 주께서 하필 내게 맡겨 주셨으니 감사.


셋째, 3남3녀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두 아들 장자와 차자를 바치게 된 나의 축복을 감사.


넷째, 한 아들의 순교도 귀하다 하거늘 하물며 두 아들의 순교이리요. 감사.


다섯째, 예수 믿다가 누워 죽는 것도 큰 복이라 하거늘 하물며 전도하다 총살 순교 당함이리요. 감사.


여섯째, 미국 유학 가려고 준비하던 내 아들, 미국보다 더 좋은 천국에 갔으니 내 마음 안심되어 감사.


일곱째, 나의 사랑하는 두 아들을 총살한 원수를 회개시켜 내 아들 삼고자 하는 사랑의 마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


여덟째, 내 두 아들의 순교로 말미암아 무수한 천국의 아들들이 생길 것이 믿어지니 감사.


아홉째, 이 같은 역경 중에서 이상 여덟 가지 진리와 하나님의 사랑을 기쁜 마음, 여유 있는 믿음 주신 우리 주께 감사.


끝으로 나에게 분수에 넘치는 과분한 큰 복을 내려 주신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립니다. 이 일들이 옛날 내 부모님이 새벽마다 부르짖던 수십 년 간의 눈물로 된 기도의 결실이요,나의 사랑하는 나환자 형제 자매들이 23년 간 나와 내 가족을 위해 기도해 준 그 성의의 열매로 믿어 의심치 않으며 여러분들께도 감사드립니다."


("나의 아버지 손양원 목사" 손동희 지음, 아가페, 225-22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