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1.2012

◈대림절 아가서 묵상: '임'을 기다림.


2012년 대림절(待臨節: 성탄전 4주간 예수 그리스도의 성탄과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교회력 절기)도 이제 거의 끝나갑니다. 올 대림절에 저는 솔로몬의 "아가"를 읽으며 "기다림"의 의미를, '임'을 간절히 기다리는 애틋한 처녀의 심정으로, 새롭게 묵상하고 있습니다.


내 사랑하는 자가 자기 동산으로 내려가

향기로운 꽃밭에 이르러서

동산 가운데에서 양 떼를 먹이며

백합화를 꺾는구나


나는 내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고

내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으며

그가 백합화 가운데에서 그 양 떼를 먹이는도다


<솔로몬의 아가> 6장 2, 3절





"당신의 눈에 부딪칠 때"

박 두 진(朴斗鎭, 1916년 3월 10일 ~ 1998년 9월 16일)


아무 데서나

당신의 눈에 부딪칠 때

타올라 미쳐 뛰는

내 안의 마음이

잔잔하고 푸른 강으로

가라앉게 하소서.


아무 데서나

당신의 눈에 부딪칠 대

노루처럼 비겁한

내 안의 결단이

칼날진 발톱

사자처럼 영맹히 덮칠 수 있게 하소서.


아무 데서나

당신의 눈에 부딪칠 때

사막처럼 팍팍한

내 마음 메마름에

뜨거운 눈물

연민의 폭포강이 출렁이게 하소서.


아무 데서나

당신의 눈에 부딪칠 때

아직도 못다 올린

새 깃발을 위하여

피 흘려 넘어져도

달려가게 하소서.


<나 여기에 있나이다 주여> 박두진 신앙 시집, 77~78, 홍성사.

Originally posted on Facebook: Tuesday, December 25, 2012 at 4:26am

◈헨리 조지와 윌리암 F. 버클리.

오늘은 웬지 페이스북에 몇 글자 끄적거릴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아무도 강요하진 않았지만 굳이 불필요한 고백을 좀 하자면, 저는 개혁파 복음주의자이며 정치적으론 보수주의자입니다. 고로, 저는 기독교는 보수주의에 가깝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아주 간단하게 말해서, "자유"라는 개념 안에 "평등" 개념이 포함되어 있다고 여기며, "사회" 또는 "민족"이라는 개념보다는 "인간," "개인," "가족," "인류," "문명," 그리고 "교회(ἐκκλησία)" 등의 개념이 우선한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시장친화적 경제정책과 넓은 의미에서 선별적 복지정책이 함께 갈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물론, 말이 되는지 안되는지는 조금 복잡한 문제이지만 말입니다.

그래서, 2012년 미국 대통령선거 때에는, '유사-기독교-이단-종파' 몰몬교도인 것을 이미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미트 람니(Mitt Romney) 후보를 찍었으며, 이번 한국 대통령선거에 대해서는, 불교신자인지 가톨릭신자인지, 이도 저도 아니면 부친을 닮아 니체의 철인정신을 추종하는 무신론자인지 도통 알 수 없는 박근혜 당선자를 선택한 한국 친척들에게 잘했다고 박수를 쳐주었습니다.

그러나, 미국 대통령선거에서 람니가 떨어져 전혀 아쉽지 않고, 한국에서 보수진영의 지지를 받은 박근혜 씨가 당선되었다고 하나도 기쁘지 않습니다!

문득, 20세기 미국 보수주의 운동의 주창자로 알려져 있는 윌리암 F. 버클리(William F. Buckley Jr: November 24, 1925 – February 27, 2008)가 떠오릅니다.


빌 버클리는, 자유시장정책과 자유무역 등 자본주의 정신을 철저하게 수호한 자타가 공인하는 자유주의 보수파(Libertarian Conservative) 계열에 속했지만, 동시에 헨리 죠지(Henry George: September 2, 1839 – October 29, 1897)의 토지공개념(土地公槪念: the Public Concept of Land Ownership)을 소극적이나마 지지했던 진정한 의미에서 개혁적 보수주의자였습니다.

미국이나 한국이나, 헌법의 보수적 가치를 경홀히 여기지 않으면서도 지공주의(地公主義)를 성경적으로 잘 소화하여 융통성 있게 작금의 현실에 적용하기 위해 도전하는 진정한 보수주의 운동이 가야할 길은 아직 멀어 보이기만 합니다.


Originally posted on Facebook: Wednesday, December 19th, 2012 at 5:21pm

12.09.2012

◈'홀로'와 '더불어': 삼위일체론적 영성에 대하여

존경하고 사랑하는 K. 목사님,

우선, 제 얼책(페이스북) 폐지 이유에 대해 약간의 오해가 있으신듯 합니다.


저는 목사님께서 얼책에 올리신 글과 전혀 상관없이 얼책 폐지를 결정했습니다. 저는 얼책을 통해 포장되는 "얼-꼴"(多夕 류영모 선생의 표현)의 가식적인 면과 감정적이고 자극적인 언어들이 난무하는 분위기가 그저 저와는 어울리는 분위기가 아니라고 결정했을 뿐입니다. (물론 제 성격 자체가 얼책과 맞지 않는다는 의미일 뿐이지만 말입니다.)

그렇지만, 일주일이 채 안되는 제 얼책활동 중에 유일하게 제 생각을 피력해 올렸던 그 짧은 글을 쓸 때, 저는, '고독의 영성'과 '개인주의'를 분명하게 구분하고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공동체의 영성'과 '집단주의' 역시 구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소 민감하고 복잡한 주제로 여겨지지만,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자면, 기독교 공동체가 추구해야 할 영성은 "삼위일체론적 영성"이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작금의 한국교회가 '삼위일체론적 영성'을 과연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오히려 이교적 '일신론'에 바탕을 둔 '집단이기주의'가 팽배할 뿐 아닌가 싶습니다.

제가 얼책에 쓴 '어두운 밤 홀로 걷기'에 대한 글은, 작금의 한국교회가 빠져있는 '개교회주의적 집단이기주의' 현상에 대한 모순적 비판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목사님께서, "우리 그리스도인은 홀로가 아니지 않나요?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안에 계시고 그 분이 우리와 동행하고 있다면 말입니다."라고 말씀하셨는데, 적극 동의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염려되는 점을 말씀드리자면, '신인합일론(神人合一論)'의 위험입니다. 물론, 목사님께서는 누구보다 '신인합일론'의 위험성을 잘 알고 계시리라 확신합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있다는 말씀, 하지만, "우리"가 성령은 아니지요. (혹, 칼빈이 클레르보의 성 버나드의 글을 대거 인용하여 주장한 "그리스도와의 연합" 개념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이라면, 제가 크게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문득, 제가 감히 목사님께 신학적 개념 운운하는 것이 참 버릇없는 행동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단지 '홀로'와 '더불어' 사이의 균형이 깨져버린 한국교회의 현실을 제 일상적 생활에 비추어 생각해 보았던 것입니다. 역설적이게도 개(個)교회적 차원에서 '함께'를 매우 강조하는 한국교회는, 범(汎)사회적 차원에서는 집단이기주의라는 추태를 보이고 있습니다.

'홀로'라는 말의 의미를 곧장 '외로움'으로 연결시키거나, '더불어'와 대립시키는 모습에서 한국교회의 집단주의적 성향이 나타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진정한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는 '홀로'와 '더불어'가 서로 대립되는 개념이 아니라, '삼위일체론적 영성'을 추구하는 건강한 공동체관(觀) 안에서 균형을 잡아야 하지 않을까요?!

마지막으로, 제가 보고 있는 관점을 제대로 전달하기 위해서 가톨릭 시인 구상 선생님의 시 두 편을 소개해 드립니다.


"그분이 홀로서 가듯"


홀로서 가야만 한다. 

저 2천 년 전 로마의 지배 아래 

사두가이와 바리사이들의 수모를 받으며 

그분이 홀로서 가듯 

나 또한 홀로서 가야만 한다.


악의 무성한 꽃밭 속에서 

진리가 귀찮고 슬프더라도* 

나 혼자의 무력(無力)에 지치고 

번번이 패배의 쓴잔을 마시더라도 

제자들의 배반과 도피 속에서 

백성들의 비웃음과 돌팔매를 맞으며 

그분이 십자가의 길을 홀로서 가듯 

나 또한 홀로서 가야만 한다.


정의는 마침내 이기고 영원한 것이요, 

달게 받는 고통은 값진 것이요, 

우리의 바람과 사랑이 헛되지 않음을 믿고서


아무런 영웅적 기색도 없이 

아니, 볼 꼴 없고 병신스런 모습을 하고* 

그분이 부활의 길을 홀로서 가듯 

나 또한 홀로서 가야만 한다.



"홀로와 더불어"


나는 홀로다. 

너와는 넘지 못할 담벽이 있고 

너와는 건너지 못할 강이 있고 

너와는 헤아릴 바 없는 거리가 있다.


나는 더불어다. 

나의 옷에 너희의 일손이 담겨 있고 

나의 먹이에 너희의 땀이 배어 있고 

나의 거처에 너희의 정성이 스며 있다.


이렇듯 나는 홀로서 

또한 더불어서 산다.


그래서 우리는 저마다의 삶에 

그 평형과 조화를 이뤄야 한다.


(구상문학 총서-제 2권: "오늘 속의 영원, 영원 속의 오늘," 구상 지음, 홍성사)

Originally posted on Facebook: Monday, December 10, 2012 at 3:31am

12.08.2012

◈아무도 없는 어두운 밤에 홀로 걷기.

아무도 없는 고요한 밤거리, 홀로 걷는 이 기분을 아시나요? 적막감(寂寞感)? 고독감(孤獨感))? 뭐 그런 분위기를 느끼는 것 같습니다. 헨리 데이빗 소로우는 이 기분을 알고 있었다지요. 저는 지금, 한국교회를 생각합니다. 공동체성을 강조하는 것, 물론 좋습니다. 그러나 과연 "홀로"를 연습하지 않고 "함께"만을 강조하는 게 공동체일까요? 그저 겨울밤 홀로 걷다 떠오른 몽상(夢想)일 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고요한 밤, 거룩한 밤 되시길~!


*사진: 공허한, 그러나 나의 하루 중에 "홀로" 그리고 "함께" 계시는 삼위일체 하나님과 가장 가까운 몬로시 메인 스트릿 야경(夜景) -Monroe, WA.

Originally posted on Facebook: Thursday, December 6, 2012 at 1:21a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