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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한국에서는 몇몇 목회자들이 뉴스앤조이(『무책임한 당신, 이제 내려오세요』 김양호)나 프레시안(『이명박은 다윗에게 배우라』 김기현)등의 신문매체를 통해서 故 노무현 前 대통령과 이명박 대통령의 관계를 구약성서의 사울과 다윗의 관계에 빗대어 비교하는 우매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즉, 자살한 사울의 죽음에 대하여 다윗이 진심으로 애도하고 슬퍼하는 모습을 보여줬듯이, 이명박 대통령 역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살을 진심으로 애도하고 슬퍼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고 강요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허튼 풍자諷刺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런 “근거 없는 심학적 성경 읽기”에 대하여 단 두 마디로 정리하겠습니다.
첫째, 사울의 죽음은 자살이 아니었습니다.
둘째, 다윗은 사울의 자살시도를 미화하지 않았습니다.
엄격한 의미에서 사울은 자살하지 않았습니다. 사울의 죽음은 오히려 타인의 도움에 의한 자의적恣意的 안락사安樂死에 가깝습니다. 이 부분에 대한 조금더 정확한 이해를 얻기 위해서는 우선 사무엘상,하 내용의 전체적인 흐름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어야 합니다. 성경을 읽는 자가 자기 입맛에 맞게 텍스트의 부분적인 장면을 골라서 자기가 주장하는 정치적 입장을 옹호하는 것은 그야말로 이단사설異端邪說입니다.
죽음 직전의 사울은 전쟁 중에 적군들에게 포위되어 당장 죽음이 임박해 있는 상태였습니다. 세상적인 관점으로 볼 때에 이런 상황에 처한 한 나라의 지도자가 스스로 자결을 결심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적군의 포로가 되어 온갖 모욕적인 수모를 당하고 비참한 죽음을 맞이할 바에야 차라리 장렬한 최후를 스스로 결정하는 모습이 왕다운 죽음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울은 “자기의 무기 담당 병사에게....네 칼을 뽑아서 찔러라. 저 할례받지 못한 이방인들이 와서 나를 찌르고 능욕하지 못하도록” 하라고 명령했으나, 그 병사가 사울의 명령을 따르지 못하자 자기가 직접 “칼을 뽑아서, 그 위에 엎어졌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삼상31:4).
불행히도, 칼 위에 엎어진 사울은 칼(또는 창) 위에 매달린 채 몇 시간 동안이나 죽지 못하고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습니다. 때마침 지나가는 아말렉 출신 한 젊은이가 이 장면을 목격하였고, 사울은 그 아말렉 출신 젊은이에게 “어서 나를 죽여 다오. 아직 목숨이 붙어 있기는 하나, 괴로워서 견딜 수가 없다” 하고 간절히 부탁합니다. 그래서 아말렉 출신 젊은이가 사울을 대신하여 그의 목숨을 끊어줍니다. 한마디로, 사울의 죽음은 자살이 아니라 자의적 안락사에 가깝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순간 다윗의 반응입니다. 요즘같이 존엄사尊嚴死니 안락사安樂死니 하는 생명경시生命輕視 풍조風潮가 팽배한 이 시대의 타락한 관점으로 보자면, 자살을 시도한 사울을 안락사시킨 아말렉 젊은이의 행동은 칭찬 받아 마땅할 일이지 처형 당할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를 처형시킵니다. 그 때에 죽어가는 아말렉 젊은이에게 다윗은 이렇게 말해줍니다. “네가 죽는 것은 너의 탓이다. 네가 너의 입으로 ‘주님께서 기름을 부어서 세우신 분을 제가 죽였습니다.’ 하고 너의 죄를 시인하였다”(삼하1:16).
다윗은 결코 사울의 자살 시도를 영웅적으로 미화하지 않았습니다. 만약에 사울의 자살을 미화하려 했다면, 사울의 영웅적 자살시도를 도운 아말렉 젊은이의 공을 높이 칭찬해줬어야 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의 행동을 오히려 왕을 "살해"(삼하1:14)한 것으로 규정하고 그 즉석에서 처형합니다. 다윗은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은 오직 하나님만의 영역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분명히 이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설사 그 사람이 왕이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한편, 다윗이 사울에 대한 비보悲報를 듣게 되었을 때 깊은 통탄을 터뜨린 진정한 이유는 단순히 사울의 죽음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그동안 사울의 타락으로 인하여 이방민족들로부터 온갖 수모와 박해를 받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의 오랜 신음소리와, 하나님이 세우신 이스라엘의 왕이 일개 이방인 조무래기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사실, 절친한 동무이자 이스라엘의 왕자인 요나단의 죽음(삼하9:1), 그리고 이 비극에 대하여 가장 애통해 하실 주님의 마음을 다윗 자신의 심장으로 통감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여겨집니다. 그러나 죽음을 대하는 다윗의 또 다른 면을 살펴보면 성경말씀이 오늘날 우리에게 전해주고자 하는 메세지가 무엇인지 더욱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무엘하 12장에는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와 다윗 사이에서 태어난 아기가 병에 걸려서 죽어가는 장면이 나옵니다. 다윗은 자신의 죄악 때문에 무고한 어린 생명이 병들어 죽어간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식음을 전폐하고 하나님께 매달려 기도합니다. 다윗의 간구하는 모습이 어찌나 간절하였던지, 그의 신하들은 그 아이가 죽었을 때 그 사실을 다윗에게 “말하기를 두려워했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 아이가 죽은 것을 다윗이 알게 된다면 그로인한 충격을 이겨내지 못하고 스스로를 상하게 하거나 "악한 마음을 품고" 어떤 일을 저지를지 예측할 수 없는 일촉즉발一觸卽發의 상황으로 보여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윗의 반응은 정반대였습니다.
막상 아이의 죽음을 알게 된 다윗은 그 즉시 훌훌 털고 일어나서 시원하게 목욕을 하고, 몸에 기름을 바르고, 새 옷으로 갈아 입고는 “성전으로 들어가서 주님께 경배”하였습니다. 이때 성전으로 올라간 다윗은 주님께서 아직 자기를 포기하시지 않으셨음을, 주님으로부터 직접, 확인받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아마도 그는 하나님의 언약궤가 성전으로 돌아오던 때에 "주님 앞에서 온 힘을 다하여 힘차게 춤을"(삼하6:14) 추던 순간을 기억해내며 시편30편을 찬양하지 않았을까 상상해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간 다윗은 신하들에게 한 상 거하게 차려오라고 명령하여 그들 앞에서 식사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에 의아해진 신하들에게 다윗은 이렇게 대답해줍니다. "아이가 살아 있을 때에, 내가 금식하면서 운 것은, 혹시 주께서 나를 불쌍히 여겨 주셔서, 그 아이를 살려 주실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오. 그러나 이제는, 그 아이가 죽었는데, 무엇 때문에 내가 계속 금식하겠소? 내가 그를 다시 돌아오게 할 수가 있겠소? 나는 그에게로 갈 수 있지만, 그는 나에게로 올 수가 없소.” (삼하12:22,23)
다윗의 이 대답에는 죽음에 대한 다윗 자신의 분명한 이해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즉, 모든 생명의 주인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또한 자기 자신의 죽음 역시 함부로 선택할 수 없다는 죽음에 대한 분명한 가치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사울보다 오히려 다윗이 자살기도를 할만한 큰 곤경에 더 많이 처했었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다윗은 자기가 믿는 주 하나님을 더욱 굳게 의지”(삼상30:6)함으로, 위기를 오히려 기회로 역전시키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게 됩니다. 성경은 위기에 처한 다윗과 사울의 차이점을 암시하여 줌으로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생명을 함부로 포기하지 않고 주님을 깊이 신뢰하는 다윗의 영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입니다. 전직 대통령이 절벽에서 투신하고, 목사가 스스로 목을 매는 이 정신분열증적인 시대에, 성경을 바르게 읽고 살아있는 생명들의 영혼을 흔들어 깨워줘야 할 말씀사역자라면, 더 이상 죽은자에 대한 슬픔을 강요해서는 안됩니다! 다윗의 영성은 슬픔에 머물러있는 영성이 아니라, "내 슬픔의 노래를 기쁨의 춤으로"(시편30:11) 승화昇華시켜주시는 주님을 신뢰하는 영성입니다. 그러므로 故人의 자살을 풍자와 슬픔으로 포장하여 미화하려는 사악한 이단사설은 이제 그만둬야 할 때입니다.
더욱이 우리는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말로 감히 형언할 수 없는 십자가의 고통을 거부하지 않으시고 마지막 순간까지 하나님 아버지를 신뢰하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기억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남에서는 매해 수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고있고, 이북에서는 아직도 공개처형과 같은 비인간적 학살행위가 자행되고 있는 이 한반도의 모순 속에서 주님의 음성에 귀기울여야 합니다.
"왜들 자고 있느냐? 시험에 들지 않도록, 일어나서 기도하여라." (누가복음22: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