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2.2010

라마단 특집: 이슬람의 도전 그리고 기독교적 숙고 4

성경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삼위일체(三位一體)로 존재하시는 하나님 가운데 한분이심을 증거합니다.

한 점의 흠이나 티끌만큼의 죄도 없으신 거룩하신 하나님의 어린양, 오직 그분이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보배로운 피를 흘려주셨기에 인간은 구원을 얻게 되었다고 가르치는 것이 바로 복음(福音)의 핵심적인 메세지입니다.

그리고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이 보배로운 피로써 이루신 구원의 역사(役事)에 대하여 단순히 인간의 죄를 면해주신 "속죄제물(贖罪: Expiation)"로써의 수준을 넘어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전혀 새로운 관계로 재정립되는 "화목제물(和解: Propitiation)"로써의 수준이라는 것을 매우 실제적으로 설파(說破)하고 있습니다.(롬 3:25, 5:11)

주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이 보배로운 피로써 재정립된 하나님과 인간의 전혀 새로운 관계란, 죄의 노예였으며 악의 종노릇하던 인간이 천지만물을 창조하셨으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아빠"(롬 8:15,23)라고 부를 수 있는 "자녀의 권세"를 얻게 된 것을 말합니다. 즉 '하나님의 가족'으로 입양된 것입니다.

이와 같이 기독교 신앙의 가장 핵심적인 위치에 있는 거룩한 입양의 교리는 인류의 역사에 있어서 복음이 들어가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나 큰 변화의 바람을 불러 일으키는 복음주의 정신의 바탕이 되었습니다. 예전에는 그저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가문의 대(代)를 이어받을 아들이 없을 경우 가문의 명예와 재산을 대물림하기 위해 이루어졌던 양자제도가,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써 거룩하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그 은혜에 대한 깊은 감동과 신앙을 실제적으로 실천하고자 부모를 잃고 세상에 버려진 어린 고아들을 직접 자녀로 삼는 입양운동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특별히, 6.25-한국-남침전쟁 이후 급증한 전쟁고아들을 머리색이나 피부색이 완전히 다른 양부모들이 해외에서 스스로 찾아와 이 아이들을 자식으로 삼겠다며 시작된 입양운동(예를 들면: 해리 홀트와 버다 홀트 부부 )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에 대한 깊은 이해와 감동 없이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Korea continues to send children out of the country for adoption; in recent years, roughly 1 of 250 Korean births are adopted by American families alone. There has been a declining trend in adoptions in recent years, but this is only due to a drop in the Korean birth rate, which is now the lowest of any developed country.(Korean Ministry of Health and Welfare, 2002)

한편, 이미 전글에서 확인했다시피, 이슬람교에서는 코란의 가르침에 따라 입양제도 자체를 법적으로 금지하고 있습니다.(참고: Adoption Dashboard - Intercountry Adoption Restrictions) 그렇다면 왜 코란의 이런 가르침이 가능할 수 있었느냐? 그 본질적인 이유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보겠습니다.

애시당초, 이슬람교에서는 '삼위일체'라는 개념을 "쉬르크(아랍어: شرك‎)"에 해당되는 유일신 알라에 대한 가장 가증하며, 용서받을 수 없는 죄로 취급합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물론 예수님을 하나님의 선지자로써 높이 인정은 하지만, 동일한 인간인 예수가 어떻게 각 개인의 윤리적이며 도덕적인 행위의 죄에 대하여 대속(代贖)해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전에, 이슬람교에서는 원죄(源罪) 개념을 아예 부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 피를 통한 대속(代贖)적 구원의 역사(役事)가 없어도 인간 스스로의 행위만으로 죄 사함을 얻을 수 있다고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들의 경전인 코란의 가르침에 의하면, 아담의 죄는 아담 자신의 즉각적인 회개로 인해 그 자리에서 자비로우신 알라에 의하여 죄 사함을 이미 받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슬람교의 교리에서는 죄의 세대에 걸친 전가(轉嫁)라는 것은 아예 없다고 가르칩니다.

중요한 것은, 이 것은 논리적인 문제가 아니라 역사적인 문제라는 것입니다. 신구약 성경을 믿는 기독교인의 입장에서는 창세기에 엄연히 기록되어 있는 역사적 사건에 대하여 완전히 왜곡하여 변질시킨 코란의 내용을 인정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이와 같은 터무니없는 조작에 대해 차마 조소(嘲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물론, 무슬림들의 종교심에 대해서는 깊은 경의(敬意)를 표하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터무니 없는 역사 왜곡을 담고 있는 코란을 경전으로 믿는 이슬람교가 아니라 우리와 똑같은 신구약 성경을 읽고도 인간의 원죄에 대한 가르침을 흐지부지 무시하거나, 또는, 복음의 핵심적인 교리를 교묘하게 오염시키는 기독교 내부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자비를 강조하며 정의로우신 하나님의 거룩한 분노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는 기독교-평화주의가 그래서 문제인 것입니다. 거룩하시기 때문에 분노하실 수 있는 하나님의 정의(正義)에 대해서 무지하거나 무시한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은 일개 휴머니스트의 영웅적 희생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인류의 원죄와 그로부터 파생되는 세상의 모든 죄문제에 대하여 인간(나)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거룩한 분노의 대상인 "화목제물(Propitiation)"로써의 죽음이었습니다.

"8그러나 우리가 아직 죄인으로 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써,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9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로 의롭게 되었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에서 구원을 받으리라는 것은 더욱 확실합니다. 10우리가 하나님의 원수로 있을 때에도 그분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화해하게 되었다면, 하나님과 화해가 이루어진 지금에 와서 하나님의 생명으로 구원을 받으리라는 것은 더욱 확실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11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또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자랑합니다. 지금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화해가 이루어졌습니다." (로마서 5:8-11, 표준새번역)

그리스도인 한명 한명이 나의 죄를 대신하는 "화목제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얼마나 깊고 실제적으로 깨달을 수 있느냐, 이것이 바로 우리가 얼마나 우리의 가정과 교회를 복음적으로 세울 수 있는지, 그리고 더 나아가, 세상의 고아와 길 잃고 방황하는 이 시대의 이방인들을 우리의 공동체로 입양할 수 있느냐를 결정하는 가장 핵심적인 복음의 정신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다음편에서 계속.....

샬롬!

j.w.s.

도표출처: http://en.wikipedia.org/wiki/International_adoption_of_South_Korean_children
사진출처: http://icarecampaign.springnote.com/pages/5622089




[Why]

"내 아버지는 聖者의 두 아들을 죽였습니다"

8.20.2010

라마단 특집: 이슬람의 도전 그리고 기독교적 숙고 3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마리아의 태중에 잉태되셨으며, 세상에 태어나 인간 부모 밑에서 일정한 성장기간을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죄인인 인간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분노의 대상이 되셨고, 우리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써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을 당하심으로 죄인인 인간으로 하여금 죄 사함을 받게 하셨다는 것이 복음의 핵심적인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죄사함'의 교리는 기독교에만 있는 가르침이 아닙니다. 이슬람교에도 죄사함의 교리가 있습니다.

이슬람교와 기독교 사이에는 죄에 대한 개념 자체가 다릅니다. 이슬람교는 원죄(原罪) 개념 자체를 부인하고,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누구나 죄 없는 선한 상태로 태어난다고"(출처:
중동선교회,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구원관 비교연구3-죄") 가르칩니다. 아담의 행위로부터 시작된 인류의 타락을 아예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슬람교에서의 '죄 사함'이란 무엇인가? 각자가 살아가면서 짓게되는 개인의 윤리적, 도덕적 행위의 죄에 대한 용서를 받는 것을 말합니다.

아래 비교표는 한국인을 상대로 이슬람의 교리를 가르치기 위하여 이슬람교측 한국선교부 웹싸이트에 기독교의 교리(左)와 이슬람교의 교리(右)를 비교해놓은 것의 일부분입니다. 특별히 '죄 사함'에 관련된 내용만 따로 떼서 모아보았습니다. (참고로, 이 비교표 원본에는 띄어쓰기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라마단 특선...." 첫 글을 보낼 때 이미 확인했듯이, 저는 이슬람교의 교리를 비판하거나 폄론(貶論)하고자 제 소중한 밤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위 비교표를 읽어보시면 도저히 그냥 묵고할 수 없는 이단적인 내용이라는 것을 쉽게 아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이 글을 쓰고 있는 이유는 이슬람의 도전에 비추어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기독교의 기본진리를 다시금 새롭게 그리고 더욱 깊게 성찰해보자는 뜻에서 입니다. 그러므로, 위 비교표 내용 중에 터무니없이 이단사설(異端邪說)적인 부분에 대한 기독교적 변증은 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면 이제 기독교에서 말하는 '죄사함으로 얻는 구원의 은혜는 과연 무엇인가?'에 대해서 생각해보겠습니다.

어제 보내드린 글에서 제가 신학적 용어 선택을 잘못한 부분이 있었습니다. 글 말미에서 한자어로 된 한글 "속죄(贖罪)"에 대하여 영어 단어 "Propitiation"을 사용한 것입니다. 이 단어 선택이 전혀 틀렸다고 할 수는 없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정확한 것은 아닙니다. 한자어 "속죄"에 대한 정확한 영어 단어는 "Expiation"이 정확합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전하신 구원의 복음은 "속죄(贖罪)" 그 이상을 의미합니다. 속죄는 그 행위의 대상이 죄를 속량하는 것 자체에 국한되어 있지만, 복음이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로써 얻는 구원의 역사(役事)는 죄를 사함받는 것 그 너머의 과정에 대해서까지 매우 상세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 3장 25절에서 "Propitiation(ἱλαστήριον)" 즉 "화목제물"이라는 구약적 단어를 매우 명확한 의도를 갖고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26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로마서 3장 23-26절)

기독교는 단순히 죄를 사함받는 수준에서 끝나는 종교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인간의 죄에 대한 속죄의 수준을 넘어서, 하나님의 "분노"를 달래어 다시 인간을 사랑하시는 분으로 돌리는 "화목제물"로써의 의미를 다루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속죄제물"이 되시어 죄를 속량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화목제물"이 되시어 인간을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하기 위한 모든 법적 절차 및 검증을 완료해 놓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일부 기독교 종파 내에서조차 이 "화목제물"의 교리를 무시하고, 하나님께는 분노와 같은 감정이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슬람의 저 위 비교표에 나열되어 있는 이단사설적인 주장은 기독교 내부에서도 종파(예를 들면: Unitarian Universalist)에 따라 많이 혼란스러워 하는 내용이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요즘 특히 한국 기독교계 젊은층에서 유행하고 있는 기독교-평화주의가 그 한 예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소위 평화지상주의적 기독교인들은 "용서"만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용서 그 이후의 단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는 거룩한 입양의 수준에 대해서는 그다지 깊게 생각하려 하지 않는 경향이 있어보입니다.

한국 개신교 역사에는, 손양원 목사님 같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전하신 거룩한 입양으로 이어지는 하나님의 구원의 복음을 직접 삶으로 실천하며 분투하신 신앙의 선배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어떤 축복보다 한국교회의 이 흐름을 이어 받은 우리 한국인 크리스천은 미국에 살면서 한국 개신교 역사에서 복음의 진수를 제대로 따르고자 희생하시고 순교하신 믿음의 선조들의 정신을 우리 후세들에게 전수해줄 의무가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우리(나) 자신이 그 정신을 실제적으로(행동으로 옮길 수 있을 만큼) 깨닫고, 나 자신의 삶으로 받아드리는 것이 먼저라는 생각이 듭니다.

다음편에서 계속....

샬롬!


j.w.s.





책 "나의 아버지 손양원 목사" 중에서


1948년 10월에 일어난 여수, 순천 반란 사건에서, 손양원 목사님은 자신의 두 아들을 모두 잃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단지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자신의 두 아들을 무참하게 살해한 좌익 바란군 청년이 잡히게 되자, 두 아들들을 대신해 자신의 양자로 삼으셨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의 이야기를 이렇게 함부로 인용해도 되나 싶어서 두려운 마음이 앞섭니다. 하지만, 제가 이 라마단 기간동안 매달리고자 하는 복음의 진수에 대해 이보다 더 적합한 예는 없다고 사려되기에, 순교한 두 아들의 영결식에서 손양원 목사님께서 직접 읽으신 감사문을 이자리에 옮기겠습니다. (저는 이 부분을 옮기기 위해서 조금전까지 손양원 목사님의 맏딸이신 손동희 권사님께서 쓰신 "나의 아버지 손양원 목사"라는 책을 다시 정독했습니다.)


"여러분, 내 어찌 긴 말의 답사를 드리리요. 내가 아들들의 순교를 접하고 느낀 몇 가지 은혜로운 감사의 조건을 이야기함으로써 답사를 대신할까 합니다.


첫째, 나 같은 죄인의 혈통에서 순교의 자식들이 나오게 했으니 감사.


둘째, 허다한 많은 성도들 중에 어찌 이런 보배들을 주께서 하필 내게 맡겨 주셨으니 감사.


셋째, 3남3녀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두 아들 장자와 차자를 바치게 된 나의 축복을 감사.


넷째, 한 아들의 순교도 귀하다 하거늘 하물며 두 아들의 순교이리요. 감사.


다섯째, 예수 믿다가 누워 죽는 것도 큰 복이라 하거늘 하물며 전도하다 총살 순교 당함이리요. 감사.


여섯째, 미국 유학 가려고 준비하던 내 아들, 미국보다 더 좋은 천국에 갔으니 내 마음 안심되어 감사.


일곱째, 나의 사랑하는 두 아들을 총살한 원수를 회개시켜 내 아들 삼고자 하는 사랑의 마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


여덟째, 내 두 아들의 순교로 말미암아 무수한 천국의 아들들이 생길 것이 믿어지니 감사.


아홉째, 이 같은 역경 중에서 이상 여덟 가지 진리와 하나님의 사랑을 기쁜 마음, 여유 있는 믿음 주신 우리 주께 감사.


끝으로 나에게 분수에 넘치는 과분한 큰 복을 내려 주신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립니다. 이 일들이 옛날 내 부모님이 새벽마다 부르짖던 수십 년 간의 눈물로 된 기도의 결실이요,나의 사랑하는 나환자 형제 자매들이 23년 간 나와 내 가족을 위해 기도해 준 그 성의의 열매로 믿어 의심치 않으며 여러분들께도 감사드립니다."


("나의 아버지 손양원 목사" 손동희 지음, 아가페, 225-226쪽)

라마단 특집: 이슬람의 도전 그리고 기독교적 숙고 2

이슬람 사회에서는 일부다처제(一夫多妻制)를 윤리적으로 인정하며 법적으로 허용하고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이슬람의 경전인 쿠란의 가르침을 인용하여, 일부다처제를 사회에 적용하면 세상에 만연한 윤리적 부패문제와 고아문제까지도 해결할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아래 글은 그 코란의 가르침 중에 한 구절입니다.

"만일 너희가 고아들을 공정하게 대처하여 줄 수 없을 것 같은 두려움이 있다면, 좋은 여성과 결혼하라 두 번 또는 세 번 또는 네 번도 좋으니라 그러나 그녀들에게 공평을 베풀어 줄 수 없다는 두려움이 있다면 한 여성이거나 너희 오른손이 소유할 것이거늘; 그것이 너희를 부정으로부터 보호하여 주는 보다 적합한 것이라." (코란 4:3)

위에 있는 코란 구절 중에 "좋은 여성과 결혼하라"라고 쓰여져 있는 부분을 영문으로 된 의역본에서는 "그들(고아들)의 어머니들과 결혼하라(you may marry their mothers)"라고 번역해놓았습니다. 즉, 이슬람의 경전인 코란에서는 고아문제를 해결 하기 위한 방법으로 고아들의 어머니들(총 4명까지)과 결혼하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부다처제는 타당할 뿐 아니라, 사회정의 면에서도 반드시 필요한 제도라는 논리입니다.

언뜻 듣기에 코란의 이 가르침은 고아문제에 대한 매우 획기적인 해결방법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고아에게 어머니가 있다면 사실상 그 아이는 고아가 아니지요. 이 영역본이 잘못되었는지, 아니면 쿠란을 쓴 저자의 생각 자체에 문제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전체적인 문맥상 이 영역본의 번역 자체에는 그다지 큰 문제가 있어 보이지는 않습니다. 한마디로, 진짜 고아들에 대한 해결방법은 아닙니다.

흥미로운 것은, 코란 제33장에는 이슬람의 창시자 무함마드가 자이드라는 자신의 노예 출신 양자의 아내인 자이나브를 취하기 위하여 알라의 계시를 이용하는 불미스러운 이야기가 나오는데, 바로 이 구절에 나오는 계시 내용 때문에 이슬람 세계에서는 아직까지도 입양제도를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아래 첨부해놓은 중동선교회(MET, Middle East Team) 이만석 목사의 글을 읽어보시면 이슬람 사회가 왜 입양제도를 인정하지 않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
[이만석 부회장 칼럼] 이슬람에서는 왜 양자를 금할까?)

그래서인지, 이슬람 세계는 해외입양을 보내지도 않지만 받지도 않습니다. 근본적으로 입양이 고아문제 해결을 위한 실용적인 방법이 아닐 뿐 아니라, 알라의 계시를 모독하는 제도라는 것이지요. 아래 도표를 보시면, 이슬람 국가들은 자국의 어린아이들을 해외로 입양을 보내지 않을 뿐 아니라, 입양을 받지도 않는다는 사실을 객관적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저는 바로 이 점이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서로 다른 가르침으로 인해 사회에 표면적으로 나타다는 가장 큰 차이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에베소서 1장 3에서 7절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7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기독교는 기본적으로 죄사함으로 얻는 구원의 은혜종교입니다. 바로 이 구원의 ("거저 주시는") 은혜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전하신 복음의 핵심입니다.



동양의 구원관은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이라"는 말로 설명이 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인간"이 아무리 지성으로 노력해도 복음 없이는 하늘을 감동시킬 수 없다고 가르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지성이라야 감천이라"는 것이 복음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寶血) 없이는 인간의 그 어떤 노력으로도 하나님의 용서를 얻어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복음의 진수(眞髓)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즉, 육신으로 오신, 삼위일체 하나님 중에 한 분)이시라는 사실을 전제로 미리 알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유일한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인 인간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분노의 대상이 되시어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을 대신 당하셨으며, 그로 말미암아 죄인인 인간으로 하여금 속죄(贖罪:Propitiation)를 받게 하셨다는 것이 복음의 핵심적인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이슬람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예수 그리스도는 마리아의 아들이자 하나님의 선지자로써..." 코란 4:171) 그러다 보니,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 즉 가장 숭고한 입양의 의미에 대해 무지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다음편에서 계속.....

샬롬!
j.w.s.




세계 입양 통계조사 자료 출처: http://www.aican.org/statistics.php?region=0&type=receiving
코란 한글 번역본 출처:
http://www.islamkorea.com/
코란 영어 번역본(의역) 출처:
http://www.submission.org/suras/sura4.htm



이슬람에서는 왜 양자를 금할까?
이만석 중동선교회(MET, Middle East Team) 부회장

92년도 - 93년도 보스니아 무슬림들이 세르비아인들에게 비참하게 핍박을 당할 때의 일이다. 이란의 국영방송에서는 연일 TV를 통해서 보스니아 무슬림 어린 아이들이 죽은 부모님들의 시체 옆에서 울부짖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 비참한 광경을 보다가 마음에 감동을 받고 그들을 돕고 싶은 마음이 솟구쳐 오르는 것을 참지 못하여 내가 잘 아는 한 이란인 기독교인이 그 아이들 중에서 몇 명을 양자로 삼아 평생 그들의 양육을 책임지겠다고 이란 국영방송국에 연락을 했던 일이 있었다.



나는 방송국에서 그의 제안을 대단히 기뻐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전혀 뜻밖의 연락을 받았다고 한다. 아무리 그 어린이들의 상황이 어렵다고 하더라도 기독교인에게는 무슬림 자녀를 양자로 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그런 것인 줄 알고 있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것이 아니었다. 물론 이슬람에서는 기독교인들에게는 절대로 양자를 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양자 제도 자체를 부인하는 것이었다.(코란 33장38절 주석, 이슬람 국제출판국, p788)



아니 이슬람의 창시자 무함마드에게도 자이드(Zaid)라는 양자가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양자 제도가 없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좀 궁금해서 관련 자료를 뒤져가며 알아보았다. 친절하게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한글 코란에도 장황하게 설명을 붙여놓고 있었다.



그 내용을 읽어 보니 자이드(Zaid)라는 노예 출신인 무함마드의 양자가 자이나브(Zeinab)라는 아름다운 귀족 여인과 결혼을 했는데 신분이 맞지 않아서 불화가 잦았고 결국 이혼했는데 이혼하자 무함마드가 며느리였던 자이나브를 자신의 아내로 취했다는 것이 한글 코란의 주석었다.



호마 다라비 박사(Dr. Homa Darabi)는 이 사건이 무함마드가 자이나브와 결혼하기 위해서 자이드에게 이혼을 요청했고 이혼하자 곧 그녀와 결혼하고자 하였으나 종족들의 반대에 부딪힌 무함마드는 알라의 계시를 받았다고 하며 며느리와 결혼한 것이라고 해석한다. (Prophet Mohammad even asked his own adopted son, Zaid Ebn Hares, to divorce his wife, Zeinab, so that he could marry her. When the members of tribe protested this marriage, because the daughter-in-law was considered like one's daughter. Mohammed answered that he received a revelation from Allah, that "A Moslem man cannot adopt another man's child." Hence Zaid was not his real son, therefore he could marry his adopted son's wife. 출처: http://www.homa.org/)



국어로 코란을 번역한 김용선 박사도 이 구절에 대해서 “자이드의 아내 자이나브는 아름다운 여자로 무함마드가 마음 속으로 사랑하고 있었는데, 추문을 겁내어 자이드의 이혼을 누르려고 했다. 그 후 자이드가 이혼했으므로 무함마드는 자이나브를 아내로 맞았다. 그가 남의 처를 취했다는 비난에 대하여, 양자의 처가 이혼하면 양부가 재혼해도 정당하다는 코란이 계시되었다.”고 주석하고 있다.(한글판 코란 김용선 역 33:37절 주석. pp440-441)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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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출처: http://met24.egloos.com/2724514

라마단 특집: 이슬람의 도전 그리고 기독교적 숙고 1

이슬람교 최대의 금식 기간인 라마단(아랍어: رمضان)이 오늘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이 기간 동안 세계의 무슬림들은 해가 뜨는 새벽부터 해가 지는 저녁까지 금식과 금욕을 이행합니다.

이번 라마단 기간 동안 크리스천들은 무슬림들의 그릇된 세계관과 종교의식을 비판하기 보다는 크리스천 내부, 특별히 미국에 있는 한국인 크리스천으로써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이슬람교 인구의 팽창으로부터 오는 도전에 비추어서 기독교의 기본진리에 대하여 깊이 성찰해보는 기회로 삼았으면 합니다.

저는 요즘, 이슬람교 사회의 가정중심적인 신앙관에 의해 기독교 사회가 오히려 도전을 받고 있다는 말을 매우 자주 듣고 있습니다. 아마도, 기독교 인구가 문화적 주류를 이루고 있거나 또는 이미 탈(脫)기독교화 된 사회에서 동일하게 나타는 현상 중에 이혼, 낙태, 성(性)관계 및 성(性)개념의 타락 등 가정문제에서 비롯되는 일련의 사회적 폐해문제와 비교해 보았을 때 이슬람권 사회가 상대적으로 깨끗하다는 의미인 것 같습니다. 전혀 틀린 말은 아니라고 여겨집니다. 그래서 최근 한국이나 미국의 기독교계에서는 기독교인의 가정불화 문제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가족의 가치를 회복하기 위해 적극적인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미국에서 현재 진행중인 동성 간 혼인 합법화를 거부하는 주민발의법안 제8호(Proposition 8)에 대한 치열한 사법권적 공방이 그 한 예라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낙태나 동성연애 문제를 기본적으로 가정문제로 보고 있는 미국 기독교계의 반응의 초점이 무엇인가 빗나가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저는 그 생각을 설명해보고자 합니다.

먼저, 저는 찰스 콜슨(Charles Colson)이나 티모디 죠지(Timothy George)와 같은 분들이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는 맨하탄선언(Manhatthan Declaration: http://www.manhattandeclaration.org/)과 같은 크리스천 시민단체 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지합니다. 이 글을 읽게 되실 모든 분들에게도, 미국의 '생명윤리와 성윤리 그리고 종교의 자유'의 본지(本旨)를 회복하기 위해 활동하고 있는 "맨하탄선언"에 참여해주실 것을 요청합니다.

그러나 제가 오늘 미국에 사는 한국인 크리스천들에게 말씀드리고자 하는 부분은, 그보다 더 깊은 차원의 기독교적 숙고가 필요한 부분입니다. 우선, 아래 도표를 한 번 살펴봐 주십시오.


위 도표를 통해 표면적으로 알 수 있는 점은, 우선, 카자흐스탄을 제외한 대부분의 이슬람권 국가에서는 어린아이들을 해외로 입양을 보내지 않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2001년까지, 한국이 미국으로 입양을 보내는 3위 국가라는 점이 눈에 들어옵니다. (2009년까지 조사된 통계조사에 따르면, 조사기관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한국은 여전히 3, 4위를 오르락 내리락 하고 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정말 이상한 일입니다. 올 11월에 있을 G20 개최국이며, 한류라는 명목하에 세계적인 문화콘텐츠를 국제사회에 수출하고 있는 장차 일품국가 대한민국은 자국의 어린아이들을 해외로 입양을 보내는 부문에서도 역시 세계적인 수준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출산율 세계 185위(1000명 당 8.93명, 2009년 미국 CIA 공식조사)라는 점과 동시에 전체 인구의 1/4이 기독교인이라는 점을 감안해보면,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출산, 낙태, 이혼, 동성연애 등의 문제도 중요하지만, 사실 지금 한국교회 사역자들이 우선적으로 돌아봐야 할 점은 입양의 복음적 의미를 실제적으로(행동으로 옮길 수 있을 만큼) 깨닫지 못하고 있는 한국인 크리스천들의 영적 지평이 열리도록 도전해야 한다는 점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입양과 복음이 무슨 관계가 있는지 조금더 구체적으로 생각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다음편에서 계속.....

샬롬!

j.w.s.


세계 입양 통계조사 자료 출처:http://www.adoptioninstitute.org/FactOverview/international.html
세계 출산율 관련 자료 출처: https://www.cia.gov/library/publications/the-world-factbook/index.html

[Why] 8년만에 찾은 아들 눈물로 외면한 부모
부산=윤주헌 기자 calling@chosun.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입력 : 2010.06.12 02:56 / 수정 : 2010.06.13 14:25



경찰이 8년 전 실종됐던 지적장애아를 찾았으나 부모가 상봉을 거부하는 바람에 다시 보호시설로 돌아가는 안타까운 일이 벌어졌다. 연합뉴스 5월 25일

윤모(20)씨는 정신지체 2급이다. 그는 2000년 7월 22일 대구시 달서구의 한 길가에서 발견됐다. 경찰이 부모를 찾아주려 했지만 허사였다. 말로 의사표현을 하기도 힘들고 사고 자체가 잘 안 되기 때문이다.

보호소에서는 윤씨에게서 DNA를 채취했다. 부모가 나타나 윤씨를 찾으면 식별할 수 있는 단서가 DNA뿐이었다. 하지만 아무도 그를 찾지 않았다. 시간은 계속 그렇게 흘러 윤씨는 대구의 한 재활병원에서 살았다. ....계속

8.02.2010

찬양, 그리고 회상(回想)

:
8월 8일 오후 6시에 "해바라기와 최덕신이 함께 하는 듀오 콘서트(Duo Concert)"라는 찬양집회가 시애틀형제교회에서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1990년대, 시애틀 지역에서 십대 청소년기를 보낸 현재 30대 이상의 1.5세 크리스천이라면 누구나 '주찬양' 팀과 최덕신집사가 이 지역에 뿌린 하나님을 향한 찬양의 열정을 잊을 수 없을 것입니다.(나중에 최덕신집사를 따르던 서북미 지역의 1.5세들이 남가주 엘에이 지역에 '주블리교회'라는 한인교회를 시작했는데, 그때 시애틀에 있던 청년 몇몇은 아예 남가주 지역으로 이사를 가기도 했습니다.) 누구보다 제 자신이 그렇습니다.

당시 저는 고등학생이었는데, 하루에 담배 2갑은 보통이었고, 술이나 대마초 그리고 그 외에 지금의 저로써는 머리 속에 떠올리는 것 자체가 부끄러운 방탕한 생활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1995년 여름, 때마침 학교에서 일어난 폭력사건에 연루되어 6개월간 유기정학을 받은 저는, 저보다 2살 연상인 교회 누나의 적극적인 기도와 인도로 살아계시는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참고로 저는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교회를 다녔다고 해서 모태신앙-크리스천입니다.)

그때 그 누나는 술, 담배, 폭력 그리고 마약 등 타락한 세상의 온갖 오물에 찌들어 있던 제 영혼의 회복을 위해 지속적으로 좋은 찬양 테이프를 빌려주거나 선물해주곤 했습니다. 물론 저는 속으로 몰래 짝사랑하던 그 누나가 지켜보는 앞에서 듣는 척만 했을 뿐이지만 말입니다.

그러던 중에 어느 순간(이 '어느 순간'의 의미에 대해서는 나중에 자세히 설명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나 자신의 적나라한 연약함과 죄문제를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제 자신의 죄에 대한 주체할 수 없는 부끄러움에 정말 쥐구멍에라도 숨어 들어가고 싶었습니다. 그런 저에게 위로와 믿음의 바탕을 제공해준 것이 바로 찬양입니다.

몇 년 전에 YWAM-AIIM이 개최한 워십컨퍼런스에 강사로 오셨던 게리 페럿(Gary A. Parrett, Gordon Conwell Theological Seminary 예배학 교수) 목사님은 현대 찬양 사역자들은 반드시 신학적 훈련과정을 거쳐야 함을 강조하셨습니다. 그만큼 기독교인의 영성에 있어서 찬양의 위치와 역할이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정말 찬양은 영원한 생명이란 무엇인지 그 섬광(閃光)을 뚜렷하게 비춰주는 통로와도 같습니다.

제가 제 자신의 죄문제와 그로인한 수치심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을 때, 예전에는 별 의미도 없이 그저 서랍속에 보관되어 있던 찬양 테이프들은 성령님께서 사역을 하실 수 있는 가장 좋은 통로가 되어 주었습니다. 그 중에 제일 많이 듣던 찬양 테이프가 바로 『주찬양 6집』이었습니다. 지금도 그 멜로디만 들어도 타임머신을 탄듯 15-6년 전의 상황으로 저를 이끄는 곡이 있다면 "너는 내 것이라"라는 송명희 씨가 작시하고 최덕신 씨가 곡을 붙인 찬양입니다.

그 후 저는 빠른 속도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된 삶을 배우기 시작했지만, 최덕신집사님에 대한 좋지 않은 소식이 공개되게 되면서 저와 몇몇 친구들은 주찬양팀에서 만든 찬양집을 모아서 한꺼번에 버리기도 했습니다. 정말 슬픈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과연 최덕신집사님을 원망하고 그의 죄인된 행동에 대해서 실망을 할만큼 저와 제 친구들이 거룩하고 경건했는냐?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최집사님에 대한 듣기에도 민망한 소식으로인해 마음 속의 우상과 비전이라는 야릇한 단어로 포장되어 있던 참으로 유치하고 인간적인 야망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을 뿐입니다. 어쩌면, 최집사님으로 하여금 자신의 정욕이 흘러가는대로 방치해두신 것 역시 하나님의 은혜의 영역에 속한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해봅니다.

이제 저는 30대 청장년에 속합니다. 그때 저에게 주찬양 6집 테이프를 선물해주었던 연상의 여인은 제 3살짜리 아들의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지금의 저에게 있어서 세상에 살아있는 인간이 부를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노래는 아마도 주님의 은혜를 노래하는 '회개한 죄인'의 신앙고백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http://www.youtube.com/watch?v=0xUG_WD_kOI


너는 부유해도 가난해도 너를 사랑하여 구원했으니

너는 내 것이라 내 것이라 너는 내 것이라

너는 잘났으나 못 났으나 너의 모든 것을 알고 있으니

너는 내 것이라 내 것이라 너는 내 것이라

너는 강하여도 약하여도 너의 힘이 되어 일으키리니

너는 내것이라 내 것이라 너는 내 것이라

너는 의로워도 악하여도 너를 나의 피로 바꾸었으니

너는 내 것이라 내 것이라 너는 내 것이라

너는 내 것이라 내 것이라 너는 내 것이라


(추신: 이 찬양은 참으로 깊은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 우주의 중심이 '나'가 아닌 '영원한 당신'이라는 진리를 단순하면서도 더없이 아름답게 노래하는 찬양입니다.)